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원작인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은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으로 불러일으켰고, 이후 영화는 킬리언 머피의 주연과 제작으로 비교적 빠르게 만들어져 올 베를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저 역시 원작 소설을 무척 인상 깊게 읽은 터라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사실 원작 소설이 장편소설이라기엔 매우 적은 분량인데다 문장들 또한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그 안에 깊이 그려져 있는 인물과 이야기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단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그런 원작의 미덕을 고스란히 옮겨오는 한편, 책을 읽으면서 문장과 문장 사이 여백마다 떠올렸을 시공간과 인물들을 빼어나게 그려냄으로써 소설만큼이나 감동적이고 인상깊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1985년 아일랜드의 자그마한 소도시, 석탄 판매상인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아내 아일린(아일린 월시)과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마을 곳곳으로 석탄을 납품하는 그의 주요 납품처에는 마을의 대소사에 관여하는 수녀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새벽녘 수녀원으로 석탄을 납품하러 간 어느날, 수녀원에 있던 한 소녀가 초면인 빌에게 다가와 제발 자신을 여기서 꺼내달라고 애원합니다. 당황한 빌은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며 소녀를 외면하고는 부리나케 수녀원을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얼마 뒤 또 다시 수녀원에 석탄을 납품하러 간 그는 석탄 창고에 갇혀 있는 소녀를 발견합니다. 애써 설마, 아니겠지, 하며 모른 척하던 그는 원장 수녀(에밀리 왓슨)와의 만남 이후 더 이상 자신이 수녀원에서 본 것들을 모른 척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본래 그의 성품이 선했던 것도 있겠지만, 자신과 홀어머니를 거두어 보살펴 주었던 어린 시절의 누군가가 자꾸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빌은 이내 누군가의 삶을 구할지도, 그러나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선택의 기로에 직면합니다.
국내에서도 올해 큰 인기를 얻었고 그 영향으로 저 또한 읽은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중심 소재는 아일랜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른바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입니다. 아일랜드의 한 수녀원에서 70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동안 '참회와 갱생'이라는 명목 아래 어린 미혼모를 비롯한 일련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노동 착취, 학대와 인권 유린, 영아 불법입양을 자행했던 사건이죠. 이처럼 엄중한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영화는 그 사건의 내막을 제대로 드러내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만나는 것은 아일랜드 교외에 위치한, 이런 곳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이내 우리는 이 평화로움이 실은 입막음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 역시 짐작만 할 뿐입니다. 마을의 대소사에 골고루 관여하는 수녀원 안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은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외면당하기 십상인, 그러나 이 평화로운 풍경 안에는 분명 있어선 안되는 장면들이 언뜻언뜻 나타납니다. 수녀원 안에 들어온 빌에게 초면인 소녀들이 대뜸 다가와 자신을 여기서 꺼내달라고 한다든지, 사람은 없어야 할 캄캄한 연탄 창고 안에 소녀가 갇혀 있다든지. 들여다 볼 수도, 캐물을 수도 없는 진실이 감춰져 있는 이 장면들 앞에서 내는 용기는 또한 얼마나 작고 위태로운 것인지. 결국 영화는 충격적인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 소재를 통해 당대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은 외면했으나 끝내 발견하고 만 것을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한 인간의 조용한 용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화는 원작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그 모든 느낌을 빼어나게 재현합니다. 마을을 지배하고 있다는 신호라도 되듯 종소리만이 소음일 뿐인, 크리스마스를 앞둔 마을의 서늘한 평온함은 그 한기가 피부에 닿을 듯 합니다. 그 안에서 일일이 설명되지 않지만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 그 사이에서 고독한 고뇌를 겪는 주인공의 얼굴이 세세하게 그려집니다. 빌은 자신의 내적 갈등과 결심을 말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너머 일렁이는 눈빛으로, 일을 마치고 귀가해 석탄 먼지를 박박 씻어내는 손의 부산한 움직임으로 우리는 그의 현재 속내를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짐작일 뿐이라도 좋은 것이, 이 모든 것이 제목처럼 중요하지만 들여다 보지 않으면 스칠 뿐일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까지도 충실하게 드리운 그 고요를 깨고 마침내 빌이 품게 되는 용기는 빌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용기는 그가 본래 착한 사람이라 생긴 것이 아니라, 과거 그를 어둡고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지켜 준 또 다른 선량한 이들의 의연한 선택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임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마을의 풍경을 불현듯 둘러보곤 하는 카메라 속에서 불안함을 의연함으로 바꾸어가며 걸음을 내딛는 빌의 모습은, 애써 고개를 돌려 보지 않는다면 지나칠 숱한 사소한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고 목도하는 것의 중요함을 이야기합니다. 그 작은 눈길이, 작은 손짓이 이 마을처럼 평온한 곳에마저도 어디엔가 숨 죽인 채 웅크리고 있을 지옥으로부터 누군가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득한 비극을 담고 있지만 짧고 생략이 많은 이야기, 그 속에서 큰 변화를 겪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을 그려내는 원작 소설이 훌륭하게 영화화될 수 있었던 건 팀 밀란츠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과 더불어 킬리언 머피의 깊은 연기 덕이기도 합니다. 그는 작년에 나온 영화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지만, 이후 제작까지 겸한 이 영화에서 이전과는 또 다른 형태의 경지에 오른 듯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목소리 한 번 높이는 일 없이, 표정 한번 일그러뜨리는 일 없이 숨을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 흔들리는 고뇌를 거듭한 끝에 의연한 선의로 나아가는 인물을 감동적으로 그려내죠.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대도 너끈히 납득할 것 같습니다. 한편 이 영화로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조연연기상)을 수상한 원장 수녀 역의 에밀리 왓슨 역시 짧지만 강렬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빌이 당도하게 되는 그 모든 진실의 어쩌면 원천일 인물이 품은, 인자한 얼굴 너머의 컴컴한 심연을 보여주는 듯한 그의 연기는 얼마 되지 않는 분량임에도 빌이 마주한 어둠의 크기를 실감케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주인공이 대면하는 악의 형태를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 것은, 세상에 우리가 맞서야 할 악이 실은 그보다도 훨씬 크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누군가의 선의로 인해 덜 위태롭고 더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었을 우리에게, 영화는 그렇게 물려 받은 선량한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존재하며, 그 힘은 지옥 같은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를 반드시 구해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90여분 남짓한 이야기가 끝난 후에 남는 여운은 그보다도 더 크고 오래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딜가나 사랑을 노래하는 크리스마스만 앞에 두고 있을 줄 알았지만 지금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힘을 주고 격려해야 할 것 같은 이번 연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말하는 그 사랑의 힘은 더 각별하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