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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기에 버티어 낸 야만의 시간

인상적인 영화리뷰 - <아임 스틸 히어>

by 김진만
<아임 스틸 히어>(I'm Still Here, 2025)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영화상을 수상한 브라질 영화 <아임 스틸 히어>는 <중앙역>,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월터 살레스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베니스 영화제 각본상에서 시작해 브라질 역사상 첫 아카데미상 수상,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페르난다 토레스) 등 여러 기록을 낳으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1970년 브라질의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감독의 어린 시절 친구네 가족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이를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가족이라는 철저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개인적인 시선을 견지한 덕분에 우리는 영화에서 거대한 국가 권력과 작은 개인의 힘이 병치된 풍경을 마주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작은 개인의 힘이 일으키는 파장을 더 또렷이 목격하면서 국가의 폭력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위대함을 더욱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1970년에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브라질도 군부독재 하에 있었습니다. 당시의 정권에게 있어 자신들과 대립하는 세력은 무력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었습니다. 파이바 가족은 한때 아버지 루벤스(셀튼 멜로)가 국회의원직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당적을 이유로 추방되었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후 지금은 정치에 손을 떼고 단란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다섯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는 여름날을 보낼 때에도 그는 남몰래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돕고 있었죠. 그런 파이바 가족에게도 독재의 그늘은 어김없이 드리우니, 루벤스가 어느날 군부로부터 진술을 빌미로 소환당한 뒤 그날로 종적을 감춘 것입니다. 집에 머물며 가족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던 군부는 루벤스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 유니스(페르난다 토레스)와 아이들마저도 그로 인한 고초를 겪게 합니다. 그 와중에 유니스는 루벤스가 어디 있는지를 동료들과 함께 끊임없이 추적하지만, 국가의 침묵 속에 루벤스의 행방은 알 길이 없습니다. 얼마 뒤 유니스는 사무치는 현실을 마주하지만, 목놓아 울 수만은 없습니다. 루벤스에 관한 진실을 추적하려는 의지의 다른 한 편에는, 아이들만은 이 고통을 똑같이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이 25년이나 흐릅니다.


<아임 스틸 히어>(I'm Still Here, 2025)


본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오기도 했고, 어린 시절 친구의 가족이 겪은 이야기를 다루어서인지 <아임 스틸 히어>에는 감독의 신중하고 진중한 태도가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국가의 폭력으로 인해 실종된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의 이야기로 충분히 격앙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에도, 영화는 감정을 끌어올리기보다 기억 속에 박제된 풍경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데에 공을 들입니다. 아버지가 실종되기 전 가족이 해변에서 누리던 행복했던 순간은 더없이 따스하게, 영문 모를 폭압 앞에서 당장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에 떨어야 하던 때는 한없이 어둡고 건조하게 말이죠. 그러니까 영화는 제3자가 취합한 사건의 전후관계를 짚어가는 식이 아닌, 당사자가 지닌 짙고 깊은 기억을 되살리는 셈입니다. 개인의 시선 앞에서 폭압적인 국가 권력의 민낯은 소상히 드러나진 않습니다. 다만 애초에 제도와 지침이 꽉 짜여진 듯 요란하지 않게, 조용하고도 일사불란하게 한 가족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국가의 기계적 탄압이, 그저 하나의 절차에 불과하다는 듯 개인은 물론 가족 공동체의 삶을 무신경하게 무너뜨리는 과정을 파이바 가족의 시선을 따라 무력하게 지켜보게 될 뿐입니다. 함께 하는 하루하루의 즐거움만 알았던 가족이 하루아침에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생사를 모르게 되고 저마다 어둠에 갇힌 채 주변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를 영문도 모른 채 감당해야만 하는, 그 속절없는 과정은 생생히 다가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권력의 폭압으로부터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는 많은 콘텐츠에서 다뤄져 왔지만, <아임 스틸 히어>의 이야기가 특히 피부에 와닿는 것은 그것이 남아 있는 이들의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조차 입을 닫은 남편의 '강제 실종' 앞에서, 권력도 그외의 어떤 사회적 영향력도 없는 개인이 그 안개 속의 진실을 파헤치기란 너무도 벅찬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유니스는 국가가 바라던 대로 속절없이 무너지지도, 눈물바람에 주저앉지도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유니스와 가족은 강제 실종된 남편을 애타게 찾는 이들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면서 신문에 실릴 사진을 찍게 되는데, 사진 기자는 신문사에서 바라는 그림일 거라며 '웃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니스는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하며, 자신은 물론 아이들까지 북돋우며 보란듯이 웃어 보이죠. 반면 포스터 속에서는 강제 실종된 남편 루벤스를 비롯한 아이들은 웃으면서 앞을 보고 있지만 유니스만 홀로 웃음을 거둔 채 멀리 다른 곳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런 유니스의 태도와 시선에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무릎 꿇지 않겠다는, 두려움에 떠는 채로 시선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유니스가 마음을 다잡는 것은, 보란듯이 미소를 띄우고 현재 너머를 내다보며 다음 걸음을 옮기고야 마는 것은 그가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유니스가 보여주는 모성애는 수동적인 자기 희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절박함과, 그럼에도 아이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삶을 살아내게끔 하려는 사랑과, 기약없는 긴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삶을 굳건히 지탱하려는 의지를 모두 끌어안고 있으며, 이런 어머니의 초상은 결코 눈물 젖을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몇 겁이 쌓였을 그 억하심정을 꾹꾹 눌러가며, 슬픔을 삼키고 사랑을 드러내며 삶을 그려가는 여인의 모습은 눈물이 앞을 가리지 않기에, 희망으로 가족을 이끌고자 하는 안간힘을 품었기에 오히려 더 큰 감동으로 이어집니다.


<아임 스틸 히어>(I'm Still Here, 2025)


유니스가 그 긴 세월에 걸쳐 무엇을 어떻게 감내해 왔는지 영화는 일일이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발소리로 복작거렸던 집안이 텅비게 된 풍경을 보여주며 그 시간의 무게를, 말 한마디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듯한 표정을 통해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무게를 짐작케 할 따름입니다. 이 영화로 브라질 배우로서는 이례적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른 페르난다 토레스는 그 형언할 수 없는 크기의 슬픔과 사랑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는 얼굴에 응축된 감정을 담아 관객에게 선보입니다. 역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브라질의 명배우이자 실제 어머니인 페르난다 몬테네그로와 함께, 페르난다 토레스는 진실을 밝히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기 안의 불씨를 묵묵히 지켜낸 여인의 모습을, 그가 버텨내고 이겨내왔을 수십년의 서사를 한 얼굴에 담아 영화를 완성합니다.


권력은 불도저처럼 세상을 쓸어버리려 했고, 그런 권력 앞에 개인의 삶은 그저 거슬리는 벌레 정도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 우리는 사라진 것이 무엇이고 남은 것은 무엇인지 끝내 알게 됩니다. 이기는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세상의 섭리를 곱씹으면, 거칠 것 없이 돌진하던 거대한 힘과 응당 서 있어야 할 곳을 지켜 온 작은 힘 중 어느 쪽이 이겼는지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임 스틸 히어>가 보여주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딘 끝에 '권불십년 화무십일홍'(권력은 10년을 가지 못하고 꽃의 붉음은 10일을 가지 못한다)을 증명하고야 만 가족의 힘이 실재했던 것임을 비로소 깨달을 때 영화가 주는 감동은 끝나고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50여년의 세월을 건너, 태평양 너머 타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이지만 그 감동과 여운은 시공간의 거리를 초월하여 손상되지 않고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아임 스틸 히어>(I'm Still Here,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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