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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타협하지 않는, 어쩔 수 없는 박찬욱의 영화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어쩔수가없다>

by 김진만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 2025)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그가 20년 가까이 품어온 대망의 프로젝트로 알려져 왔습니다. 영화 '도끼', '모가지' 같은 살벌한 가제들을 거쳐 처연함마저 느껴지는 지금의 제목 '어쩔수가없다'에 이르렀다지요. 감독이 공언한 대로 영화는 그를 스타감독의 반열에 올린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로 나온 영화들 중 대중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폭력성과 선정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어도 상당히 옅게 들어가 있고, 스토리도 무척 직선적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독이 철저히 대중의 입맛에 맞춰 영화를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습니다. 한층 유한 방식으로, 경쾌한 표현으로 만들었지만 감독은 여전히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든 것입니다. 전작들과의 연결성이나 고유의 스타일, 일관된 주제의식 같은 것들과 상관없이 감독의 의지에 따라 만든 듯 한 영화여서, 감독의 전작들처럼 여전히 누군가는 열광할 것이고 누군가는 갸우뚱하는 문제작으로 남을 것입니다.

25년간 제지업계에 종사해 온 만수(이병헌)는 어릴 적 살았던 집에서 아내 미리(손예진), 아들 시원이와 딸 리원이, 반려견 시투와 리투와 함께 장어를 구워먹으며 보내는 지금을 가리켜 '다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초반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면 지극히 불길한 징조인 법. 만수는 그 말이 무색하게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해고 당합니다. 만수는 3개월 안에 재취업하겠다고 공언하지만 그 약속의 날은 요원하고 퇴직금은 바닥이 나니, 미리는 차를 팔고 테니스와 댄스를 그만두고 넷플릭스를 끊고 반려견들을 친정으로 보내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데 앞장섭니다. 딸 리원이의 과외 선생은 딸의 음악적 재능이 대학교수로부터 레슨을 받아야 할 수준이라고 치켜세우는 데 답답할 노릇. 자기보다 나을 것도 없는 사람이 자기가 응당 있어야 할 자리를 꿰찬 모습을 보며 탄식만 삼키던 만수는 최후의 계획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동종 업계 비슷한 연차이면서 면접에서 만나면 자신을 이길 가능성이 농후한 이들을 선제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만수는 가짜 회사를 내세워 자신과 비슷한 경력의 경쟁자들의 지원서를 받고, 그들의 신상을 파악한 다음, 제거 대상을 선별해 나갑니다. 그렇게 구범모(이성민), 고시조(차승원), 그리고 문 제지 특수지 반장 최선출(박희순) 같은 사람들이 만수의 타겟에 오릅니다.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 2025)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도끼)가 원작으로 이탈리아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이야기를 박찬욱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자신만의 결과물로 내놓았지만, 오래 품어왔다고 해서 그의 오랜 스타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쩔수가없다>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감독이 앞서 만든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이 전작들과 다른 영화였듯, <어쩔수가없다>는 또 그들과 다른 영화입니다. 따라서 전작들로부터 받았던 감명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그 기대를 배반할 것입니다. 2005년 <친절한 금자씨> 이후 박찬욱 감독은 줄곧 정서경 작가와 공동으로 각본 작업을 해왔는데, <어쩔수가없다>는 20년만에 처음으로 박찬욱 감독이 역시 감독으로 알려진 이경미 작가와 공동 작업하여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에는 생각보다 이경미 작가의 색깔이 (박찬욱 감독의 연출에 힘입어 더욱 더) 짙게 배어 있습니다. 가장 뚜렷하게 느껴지는 색깔은 떄로 신경질적으로까지 치고 나가는 코미디인데, 지금껏 박찬욱 감독의 뒤틀린 유머감각이 꾸준히 빛을 발해오긴 했지만 이 영화는 그 중에서도 코미디가 가장 노골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코미디가 우리가 쉬이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을 주인공 삼아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취업을 위해 사람을 죽이겠다는 사람을, 아무리 형편이 어렵고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한들 어떻게 공감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중심에 세워서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뒤틀린 유머로 가득 차 있고, 관객을 쉬이 헤어나오지 못하게 할 여운을 남길 의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종내에는 전작 <헤어질 결심>이 남기는 끝모를 여운과 완전히 상반된, '벙찐' 상태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수가없다>는 지금까지의 박찬욱 감독 영화 중 우리의 삶과 사회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듯도 합니다. 엔딩은 없다. 납치, 유괴, 살인 등 섬뜩한 범죄가 난무하는 '박찬욱 월드'에서 해고는 지극히 우리의 일상과 근접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재취업을 위해 살인을 계획하는 만수의 상황만 아니면, 만수네 가족은 영화 초반 "다 이루었다"는 만수의 말처럼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이렇게 '정상적인' 가족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렇게 일상과 맞닿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우리는 그 중심에 선 인물에게 쉽게 이입할 수 없다는 점이 영화의 강점이자 난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기이한 스탠스에 선 영화로, 감독은 온전하게 돌아가는 듯 하지만 그 실상은 결코 온전하지 않은 세상의 일면을 어느 때보다 직접적으로 저격합니다. 햇볕에 가려진 면접관의 얼굴처럼, 영화 속에서 만수와 그 비슷한 가장들의 밥줄을 쥐고 흔드는 윗분들의 모습은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만수가 '개싸움'을 벌여야만 하는 상대는 그들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저마다 각자의 불쌍하고 처량한 사연이 있는 가장들입니다. 영화에서 만수를 비롯해 여러 인물들이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는 관용어구이자 감탄사로서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한 발짝만 물러나면 그럼에도 길은 또 있을 것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현듯 들이닥친 '도끼질'은 좌절과 자괴감의 바람을 몰고오고, 결국 그 바람에 휩싸인 이들은 막다른 길의 환각 속에서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끝까지 그 위로까지 총부리가 향하지 않은 채, 이 '데스게임'은 결국 그들끼리만 벌이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경쟁사회란 얼마나 부박한 곳인지.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 2025)


<어쩔수가없다>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웃음이 새어나오는, 희극이나 비극이냐를 따지자면 분명 희극에 가까운 영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는, 대담하지만 주도면밀하지 않은 만수의 계획가 그 실행으로 촉발되는 우스꽝스러운 카오스가 해프닝에 머물지 않고 결국 확장되어 그들 삶의 발목을 잡고야 마는 모습에 웃음에는 냉기가 서리게 됩니다. 그러니 영화는 감독이 백날 오락성과 대중성을 추구했다고 해봤자 관객이 결코이입할 수 없는 정서를 안을 수 밖에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찬욱 감독의 특유의 양식화된 연출에 역동성이 한층 강화되고, 거기에 생활감과 현실성이 가득한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지면서 영화는 활기를 유지합니다. 만수 역의 이병헌 배우는 이번에도 심신이 편안해지는 발성과 발음을 바탕으로 극도의 일상성을 연기에 불어넣으며 무모하고 낯부끄럽고도 짠한 가장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덕분에 우리는 만수에게 공감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시선을 무리없이 견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 만수의 아내 미리 역의 손예진 배우는 과거 이경미 감독과 호흡을 맞춰본 만큼 우아함 너머의 서늘한 광기를 노련하게 드러내며 이병헌 배우를 따르기만 하지 않고 균형있는 긴장감을 형성합니다. 한편 만수가 꿈꾸는 자리를 먼저 차지한 인물로서 어떤 모습을 드러낼지 알 수 없어 흥미진진한 최선출 역의 박희순 배우는 근래 가장 고삐 풀린 듯한 연기로 화면을 장악합니다. 좌절의 늪에 몸을 맡긴 채 찌질한 현재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마는 구범모 역의 이성민 배우와 그런 현재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아내 이아라 역의 염혜란 배우가 보여주는 에너지도 대단한데, 영화에서 가장 활기 넘치고 가장 웃긴 장면들이 이들이 등장할 때 나오기도 합니다. 단정하고 친절한 모습에 좌절감을 숨긴 고시조 역의 차승원 배우 또한 정갈한 연기로 박찬욱 감독의 색깔에 무리없이 녹아들며 긴장감을 형성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는 대체로 여성 캐릭터들이 큰 활약을 하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다툼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여성들이 가장 명민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이 만드는 일이 환경 파괴가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종이를 만들기 위한 나무는 따로 심는다"고, 영화 속 한 등장인물이 말합니다. 특히 만수와 그 경쟁자들이 오랫동안 종사한 분야인 특수지 파트는 지폐의 재료로서 종이를 취급하죠. 종이가 만들어지기 위해 나무들이 따로 심어진 뒤 베어지고, 그렇게 베어진 나무들이 종이가 되어 지폐가 되는 일련의 과정은 필사적으로 싸우지만 그 성과 또한 어딘가와 누군가의 부속품이 되는 것에 머물고 마는 만수와 경쟁자들의 처지를 비유하는 듯 합니다. 일평생 종이에 삶을 바쳐 온 만수는 잘 만들어진 종이를 만질 때의 그 포근함을 무척 좋아한다지만 그 종이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무수한 나무들이 베어졌을지, 그리고 그래봤자 소모품인 종이의 그 포근한 질감이 얼마나 갈지를 생각하면 참 부질없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엔딩 같은 건 없다고 선언하듯 당혹스러운 엔딩 앞에서, 우리는 현실에 과장된 사건 한 스푼을 얹어 기승전결을 논할 수 없이 끝나지 않는 부조리를 이어나가는 영화의 허허실실한 듯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쩔수가없다>는 외형이 대중적일 순 있으나 끝내 타협하지 않는, '어쩔 수 없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일 것입니다.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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