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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덴 Jul 11. 2017

믿음과 의심의 사이는 백지장 한 장 차이

[고덴의 영화읽기 23]  <분노> 

지난 해 2016년 극장가 최대의 화두는 <곡성>의 개봉과 그 영화에 대한 해석의 논쟁이었다. 언젠가부터 마을에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눈에 띄기 시작하며 마을에는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모든 원인이 외지인 때문일 것이라며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심이 확실한 믿음으로 바뀌려는 찰나 영화 속에는 정체 모를 여인(천우희)과 무속인(황정민)이 등장하며 관객은 저마다 의심의 대상을 바꾸고 다시 혼란에 빠진다. 


보통 이런 추리를 요하는 영화에서 장치로 사용하는게 ‘맥거핀(Macguffin)’이다. 영화 용어로서 맥거핀은 간단히 속임수,미끼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다. 이야기 속에서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극에서는 사라져버리는 장치를 뜻한다. 관객들은 그 미끼를 물었다 뱉었다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 하고 끊임없이 캐릭터들을 의심한다. <곡성>과는 또 다른 방식의 맥거핀으로 점철되었지만 <분노> 역시 의심 앞에 놓인 나약한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건드린다.


한 낮의 살인사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찜통같은 더위를 맞이한 어느 날 한 부부가 무참히 살해된다. 현장에 남은 유일한 단서는 붉은 피로 쓰여진 ‘怒(성낼 노)’자 한 글자. ‘분노’를 뜻하는 이 글자는 과연 누가 썼을까. 의문의 살인 사건으로 일본 전역이 공포에 떨게 된다.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진 채 1년의 시간이 지났고, 영화는 도쿄,치바,오키나와로 장소를 옮기며 세 명의 용의자를 등장시킨다. 


한적한 치바의 항구에서 살아가는 요헤이(와타나베 켄)는 딸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때문에 걱정이 많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 도쿄의 유흥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딸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온다. 고향으로 돌아온 딸은 아버지 밑에서 2개월 전부터 일하고 있는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두 부녀는 이내 타시로의 베일에 가려진 과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마침 뉴스에서는 다시 1년 전의 살인사건을 조명하고 용의자의 몽타주를 공개하는데 타시로와 너무도 닮았다. 


도쿄의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유마(츠마부키 사토시)는 클럽파티를 즐긴다. 그는 동성애자다. 그가 즐기는 유흥 역시 모두 동성의 연인들과의 시간들이다. 하루는 신주쿠에서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와 밤을 보내고 그에게 동거를 제안한다. 유마는 나오토에게 점점 깊은 감정을 가지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나오토가 의심스러워진다. 역시 뉴스에는 용의자가 나오고 있었고 유마는 용의자와 닮은 나오토가 더욱 신경쓰인다.


어머니와 오키나와로 이사를 온 고등학생 이즈미(히로세 스즈)는 그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와 무인도를 여행하던 중 배낭여행족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를 만난다. 오키나와에서 그의 정체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뭔가 불안하다. 역시 타나카도 용의자의 몽타주와 많이 닮아있다.


감독은 교차편집을 통해 세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며 영화의 중반부가 넘어설 즈음 관객들과 게임을 시작한다. 과연 이 셋 중 부부 살인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이끌림,의심 그리고 분노



세 용의자의 등장이 가지는 공통점은 셋 모두 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란 점이다. 그들의 과거는 아무도 알지 못 한다. 하지만 그들 주변의 사람들은 먼저 그들에게 이끌린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믿는 거야?”라는 타나카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 이끌림은 어느 새 믿음으로 바뀌어있다. 우리는 보통 믿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는 보고싶은 모습만 보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건 동시에 그 정도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그 사람으로부터 아픔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의 믿음은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을 수 있다. 뉴스의 용의자 얼굴이 공개되는 순간부터 모든 믿음은 무너진다. 결국 무너진 믿음은 의심을 넘어 분노로까지 이어진다.


초호화 캐스팅



영화는 일본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 <분노>를 원작으로 한다. 연출을 맡은 이상일 감독은 이전에도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악인>을 영화화한 적이 있었고 이번 작품으로 두 번째 협업을 이뤄냈다. 이상일 감독은 재일교포 3세로서 <훌라걸스>를 만들며 일본에서 이름을 알리고 국내에도 알려지게 됐다. 


<분노>는 일본 영화계에서 차세대 거장으로 자리 잡아가는 이상일 감독이 인기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점에서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더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코 캐스팅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해 힘 있는 이야기의 중심을 확실히 잡아나간다. 이제는 헐리우드에서도 자주 볼 수 있고 일본을 상징하는 배우가 된 와타나베 켄과 약 10여년 간 젊은 세대의 배우들 중 가장 입지를 튼튼히 하고 있는 두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와 미야자키 아오이가 힘을 보탰다. 여기에 가장 주목받는 신예 중 하나인 히로세 스즈까지 더해지며 배우들을 보는 재미로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가 됐다. 


게다가 음악감독은 <마지막 황제>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았다. 이만하면 일본 영화사에서는 <어벤져스>급 캐스팅을 이뤄낸 셈이다. 결국 <분노>는 지난 3월 열린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14개 부문을 수상하며 보란듯이 위용을 뽐냈다.


추리보다는 내면에 초점



영화의 제목은 ‘분노’지만 이 영화의 전체적인 감정선은 분노보다는 믿음과 의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스릴러 영화로서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 같아도 실제로 이 영화는 인간의 나약한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감독은 쉽게 이끌리고 이유도 모른 채 믿기 시작하고 불현 듯 의심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들을 ‘분노’라는 제목과 연결시켜본다. 영화를 다 보고난 관객들은 비로소 그제서야 왜 제목이 분노인지 이해할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영화 <분노>를 극장에서 보기가 그리 녹록치 않다. 애초에 개봉관이 많지도 않았고 배치도 거의 아침이나 심야로만 되어있어 관객들로부터 상당한 수고로움을 요한다. 이렇게 훌륭한 수작을 보기가 쉽지 않다니. 아쉬움을 넘어 분노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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