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덴의 영화읽기 28] <인정사정 볼 것 없다>
JTBC 화제의 예능 프로그램 <전체 관람가>. 충무로를 대표하는 10인의 감독이 매주 한 편 저예산으로 단편 영화를 찍는다는 기획이다. <출발! 비디오여행> 류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 형태가 아니고도 영화가 TV와 조우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이지 않을까. 프로그램은 크게 세 꼭지로 나뉜다. 먼저 영화를 제작하는 메이킹 필름을 보여주고 스튜디오에서는 토크가 진행이 되고 마지막엔 10여 분 길이의 단편 영화가 공개된다. 요즘 예능의 트렌드인 관찰 예능과 토크쇼, 거기다 영화 상영을 얹은 전에 없던 매우 영민한 기획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화려한 면면의 출연진들 속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다. 11월 26일 7회차 방송분에서는 그 감독의 작품이 공개되었다. 객석에 자리한 대감독의 까마득한 후배 감독들은 눈물을 훔친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말이다. ‘시네아스트’, ‘미장센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명세 감독이 그 주인공이었다.
시네아스트 이명세
프랑스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몸집이 비대하게 커진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붕어빵 찍어내듯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쏟아내자 그 중에서도 개성 있는 스타일과 가치관을 담고 있는 감독들을 따로 격상시켜 ‘시네아스트’라 표현했다. 1950년대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찰리 채플린이 시네아스트로 분류된 최초의 예이다. 즉 시네아스트란 표현은 자신만의 예술관과 형식미를 갖춘 감독에게만 붙는 명예로운 훈장과도 같은 의미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자신만의 예술관으로 각자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감독들이 몇몇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미장센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이명세 감독이야말로 시네아스트의 옷을 입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데에 반기를 들 영화팬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명세 무비’의 신호탄
데뷔작 <개그맨>(1988)과 두 번째 장편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충무로에 연착륙했던 이명세는 <첫사랑>(1993), <남자는 괴로워>(1995), <지독한 사랑>(1996)으로 필모그래피를 채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후의 세 작품에서 이명세는 평단으로부터는 여전히 박수를 받았으나 관객들에게는 외면을 받아왔다. 극심한 온도차를 느끼던 그가 권토중래하여 내놓은 작품이 바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명세 무비’의 제 2막이 시작된 것이었다. 1999년, 한 세기의 마지막 여름에 극장가는 신선한 충격을 맞았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액션
비가 억수로 내리던 어느 날, 도심 한 가운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신출귀몰한 살인자 장성민(안성기)을 잡기 위해 서부경찰서 강력반이 나선다. ‘영구’란 별명을 지닌 우 형사(박중훈)와 그의 파트너 김 형사(장동건)는 잠복근무를 통해 장성민과의 거리를 좁혀 나간다. 하지만 희대의 살인마를 잡기가 그리 녹록치는 않다. 결국 형사들은 장성민과 내연 관계에 있는 김주연(최지우)의 집을 급습해 그를 포획하려 한다. 악천후가 거듭되는 가운데 과연 이 추격전의 승자는 누가 되었을까.
사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일지 아니면 기막힌 반전이 숨겨져 있을지 결말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는 영화는 아니다. 범인을 쫓아가는 과정의 긴장감과 그 과정 속에서 선보여지는 독특한 영상미의 연출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영화 시작부터 스포츠카가 최고 속도로 달리는 듯한 템포로 박중훈은 한 무리와 결투를 벌인다. 머지않아 비지스의 명곡 ‘Holiday’에 맞춰 안성기는 은행잎 날리는 빗속에서 액션을 보이고, 장동건의 지하철 격투씬, 박중훈과 박상면의 결투를 거쳐 종반에는 그 유명한 안성기와 박중훈이 폐광에서 벌이는 수중전까지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관객의 아드레날린 수치를 높인다.
마치 만화와도 흡사해 보이는 이명세만의 독보적 연출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1999년 개봉 당시 단관 극장의 스코어로는 매우 흥행한 66만 명의 성적을 거두고 그 해 청룡영화제의 최고 영예인 작품상 트로피까지 챙겼다. 이명세의 화려한 복귀였다.
화려한 캐스팅
지금은 영화제가 아니면 한 번에 모이기 힘든 배우들이 한 작품에 나온다는 점도 이 작품의 가치가 높아지는 요소가 된다. 안성기와 박중훈은 <칠수와 만수>, <투캅스>에 이어 세 번째로 조우하며 충무로 최고의 콤비 파워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7년 후 2006년에 둘은 <라디오스타>에서 재회하며 다시금 충무로에서의 입지를 관객들에게 확인시켜줬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영화의 두 축인 안성기와 박중훈의 캐릭터는 상당히 대비된다. 안성기는 러닝 타임 내내 딱 두 마디를 제외하면 대사가 없다. 표정과 액션만으로 캐릭터를 소화해야 하는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었다. 역시 ‘국민배우’라는 칭호는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박중훈은 대사량이 많다. 안성기와는 달리 많은 대사량 속에서 말의 맛을 살려야 하는 또 다른 어려운 작업을 선보였는데 이 점은 박중훈의 역량 중 가장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분야였다. 특히 박중훈이 맡은 형사 캐릭터는 이후 한국 영화계에 등장하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 <베테랑>의 황정민, <범죄도시>의 마동석 등 깡패보다 더 깡패같은 반전형사 캐릭터의 원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더 유의미하다.
박중훈의 파트너 형사로 나온 장동건은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이 작품에 출연했고 결국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까지 거머쥐며 커리어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2년 후 <친구>에서는 주연으로 나서며 흥행배우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장동건은 청룡영화제에서 신인상,주연상,조연상을 모두 수상한 기록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풋풋한 최지우의 초기 모습도 영화의 흥미로운 감상 포인트 중 하나다.
손꼽아 기다리는 이명세의 신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이명세 감독은 <형사>와 <M>을 내놓으며 계속해서 예술혼을 펼쳤다. 하지만 2007년 <M>의 개봉 이후 관객들은 그의 장편 연출을 볼 수 없었다. 2014년에 리메이크 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아주 잠깐 그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걸로는 이명세의 미장센을 보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2013년에는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에 이어 오랜만에 설경구와 문소리가 다시 호흡을 맞춰 화제가 되었던 영화 <스파이>가 개봉했다. <스파이>는 설경구,문소리의 재회와 더불어 이명세 감독의 컴백작이란 점으로 더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제작사와의 마찰로 인해 감독이 바뀌는 사달이 났고 이명세의 복귀시기는 좀 더 유예되었다. 이명세의 붓으로 그려지는 스파이 액션물은 과연 또 얼마나 독창적이었을까.
<전체 관람가>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오랜만에 이명세 감독의 영화를 만날 수 있긴 했지만 장편이 아닌 단편이었다는 점과 스크린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에 완전한 해갈은 되지 않은 느낌이다. 머지않아 우리 시대 ‘시네아스트 이명세’의 새로운 작품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길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