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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덴 Aug 26. 2019

<우리들>에 이어 <우리집>, '나'가 아닌 '우리'

1. "네가 (my home이 아니라) 우리집에 놀러 왔으면 좋겠고 우리집에서 함께 (my family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흉을 보고싶어. 우리 오늘 같이 놀까?"    

 

위 두 문장에서 네 번에 걸쳐 쓰인 '우리'라는 단어에는 내가 사는 집, 함께 사는 가족 그리고 집으로의 초대를 받은 대화상대가 모두 포함된다.      



1-1. 굳이 나란 인간의 가치관을 과장되게 설명하자면 자유주의란 영토 위에 개인주의라는 깃발을 꽂으며 살고싶어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우리'와도 같은 집단주의적 주어를 부정한다. 허나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지 않나. 대한민국이란 땅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기에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우리'나라라고 말하는데 있어 나는 주저함이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집>이란 영화도 제목부터 태생적으로 한국 영화인 것이다.      




2. 연출을 맡은 윤가은 감독이 전작 <우리들>에 이어 속편과도 같은 비슷한 제목의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반가운 이름의 복귀이다.      



2-1. 연출(펼 '연', 날 '출')이란 단어엔 여러 복합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지만 우선적으로는 '연기를 뽑아내는' 것이 가장 표면적 의미에 기초한 행위이다. 연출이란 단어가 감독을 대신해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자고로 감독이란 작자는 배우로부터 '어떤' 연기를 '어떻게' 뽑아낼지를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가은 감독은 정말 훌륭한 연출가다. 그래서 그녀의 복귀가 반가운 것이다. 대체 이토록 동심 어리며 동시에 성숙한 형용모순의 연기를 윤가은 말고 누가 뽑아낼 수 있을까.     



3. 한 시간 반 남짓동안 아이들의 이야기에 웃고 울며 또 고맙고 미안했던 이유는 분명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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