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랑 Dec 26. 2021

두 사람이 그려가는 사랑의 모양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 리뷰

어릴 때 우리는 모든 아름다운 감정을 함축한 단어가 ‘사랑’이라고 배웠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세상에 실재하는 사랑이 모두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간다. 수십여 년을 전혀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 어떻게 이상적일 수만 있으랴. 그러나 경험은 기억을 만들고, 모든 기억은 아릿한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듯 쉽게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감정도 분명 세상에 존재한다. <내 깡패 같은 애인>도 그렇다. 주인공 세진과 동철도 ’사랑한다’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 없지만, 나는 그들이 나눈 감정적 교류가 단순한 위안을 넘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안다.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은 주인공 세진의 삶이 예상에서 조금씩 어긋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학 생활 동안 열심히 준비해서 입사한 회사가 3개월 만에 부도를 맞을 줄 꿈엔들 알았을까. 설상가상 밀려나듯 이사 온 반지하 바로 옆방에는 동네 건달이 산다. 첫만남부터 반말은 기본, 통성명은 자연스럽게 생략, '옆집 여자'로 세진을 통칭하는 '옆집 남자' 동철은 그녀가 백수라는 것을 알고 ‘취준’ 근황까지 물으며 아픈 곳을 쿡쿡 찌른다.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하는 것’. 생활 반경이 비슷해서일까, 처음 세진에게 동철은 그런 존재였다. 분식집, 편의점, 골목길.. 세진의 발길이 닿는 일상적인 공간에는 어디든지 동철이 있었다.



대상이 무엇이든 눈에 밟히면 마음이 쓰이기 마련이다. 모난 세상에서 때로는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 경험으로 알고 있는 동철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세진에게 눈길이 간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은 타인의 얼굴에 비친 외로움을 쉽게 파악하기 때문일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던데, 동철은 세진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녀를 위기에서 구한다. 편의점에서 불량 청소년 손님에게 시달릴 때도, 면접날 우산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때도, 영양실조로 홀로 방에 쓰러져 있을 때도 어김없이 나타나 그녀를 위기에서 꺼내는 인물은 다름 아닌 동철이다. 겉보기에는 거칠기만 한 동철이지만, 조직을 떠나라며 등 떠밀듯 재영을 보내려는 모습과 녹록지 않은 삶을 꾸역꾸역 견디는 세진을 매번 일으켜주는 그의 속내는 누구보다도 따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이스’라는 핑계로 조직에서 버림받듯 교도소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그이기에, 아끼는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삶의 풍파를 최대한 피해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다. 거친 태도와 행실을 방패 삼아 인간적인 면모가 숨겨진 동철은 가장 반전을 주는 캐릭터였다.


취업을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는 세진과 동네 건달 동철. 성격도, 살아온 환경도 전혀 반대인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곁을 내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영화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바로 '힘들 때 곁을 지켜준 사람에 대한 소중함'이다. 자기 이야기만 하기 바쁜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말처럼 ‘내 말을 들어줄 단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면접에서 수모를 겪었을 때도, 취업을 빌미로 성상납을 요구 받았을 때도 자신의 일처럼 마음을 써준 동철에게 느낀 세진의 감정은 분명 사랑이었을 것이다. 처음 두 사람이 안았던 밤, 그러니까 세진이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며 '개의 밤'으로 비유했던 그 날 어쩌면 켜켜이 눌러담았던 세진의 마음이 발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관계가 늘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르면 얼마나 좋을까. 순탄하지 못한 현실 속 순탄하게 흘러가던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빌미로 금세 멀어지게 된다. 남자친구 신분으로 세진의 고향집을 찾은 동철이 세진과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인 것. 둘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세진은 아버지의 반강요로 서울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취업을 준비하던 세진이 동철과의 관계를 끝으로 자신에게 주는 기회의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절실했던 세진의 염원을 아는 동철은 그녀에게 다시 도전해보라고 설득한다. 이것 뿐이랴, 면접에 늦은 그녀를 위해 직접 회사를 찾아가 면접관을 포위하며 시간을 번다. "걔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나는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내가 이러고 있는 게 걔를 도와주는 거예요." 미처 전하지 못했던 동철의 고백이 제3자에게 전해지는 순간, 세진은 면접장에 도착하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스쳐가듯 서로를 대면한다.


동철의 헌신이 기회가 되어 취업에 성공한 세진은 이윽고 회사에서도 최연소 대리 타이틀을 걸 만큼 높은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신입사원을 통해 자신의 풋내기 시절을 회상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세진은 여전히 마음 한 켠으로 동철을 떠올린다. 가장 좌절했던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진이 다시 일어날 수 있던 이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철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변할 만큼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세진은 "단 한번만이라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되뇌이며 어디에 있든 동철이 행복하길 기원한다.

서툴었던 지난 연애는 반드시 후회를 남긴다. 그 때 이랬었다면, 지금 내 모습을 그가 봤더라면, 그를 지금 만났더라면… 가령 이런 식이다. 당시에는 당연했던 순간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하나 빛나는 삶의 조각들이었다는 사실은 늘 뒤늦게 마음을 울린다. 결말이 지어진 관계는 늘 ‘만약’을 생각해보게 하지만,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현실에서 우연한 재회는 말처럼 쉽지 않다. 놓쳐버린 관계를 더욱 붙잡고 싶은 이유는 관계가 음악을 반복재생하듯 쉽게 되풀이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 속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 두 사람은 웃으며 마침내 서로를 조우한다.



도덕적이지 못한 직업을 가진 동철이지만, 속정이 깊고 순수한 캐릭터라는 점을 알아가면서 영화가 진행될 수록 누구보다도 그를 응원하게 됐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직을 대신해 교도소를 가고, 세진의 면접을 위해 일면식없는 사람 앞에서 자기 고백을 늘어놓고, 재영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는 동철이라는 캐릭터가 이제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깡패같은 애인>은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확신이 없는 길을 걸어가는 고독한 청춘의 모습, 쉽게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오묘한 속성. 그리고 반대되지만 서로를 누구보다도 의지하는 두 캐릭터를 통해, 건강한 삶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직면하게 해준다.


세상이 주는 시련을 번번이 버텨내는 세진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벽을 쌓고 있는 동철이라는 인물은 분명 어디엔가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운명처럼 서로를 만나게 된 두 사람의 관계는 어디로 흘러갈까. 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든 앞으로는 더 행복하길.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마음으로 살게 됐는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