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있는 사람
전에 만났던 애인은 집에서 영화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자고로 영화란 큰 화면으로 터져나갈 듯 빵빵한 사운드로 봐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사람이라 그게 영 마뜩잖았지만, 네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영화가 시작할 때면 냉장고에서 몇 시간은 꽁꽁 매어둔 캔맥주를 꺼내왔다. 포카칩 하나에, 칭따오 맥주 하나씩. 우리는 서로 오늘 고생했다며 맥주캔의 경쾌한 마찰음과 소소한 안주를 보상삼아 매일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보는 영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영화 취향이 완전히 달랐다는 거다. 나는 ‘영화 같은 영화’보다는 일상의 단면을 똑 떼어내서 담아놓은 듯한 밍숭맹숭한 영화를 좋아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8월의 크리스마스>, <접속>, <안경> 등등. 나라는 존재의 심상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탓인지, 나의 저변과 동떨어진 세계라거나 지나치게 주인공을 우상화하는 이야기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잔잔함에서 내 존재의 안정성을 찾았다면 그는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일상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를테면 그가 나를 위해 <리틀 포레스트>를 봐주고 내가 그를 위해 마블 시리즈를 보는 식이었다. 어느 사랑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우리에게도 서로에게 맞춰가려는 노력이 동반되는 때가 있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배려이자, 만용이자, 한때의 바람이 점철된 순간.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서 꿈뻑꿈뻑 졸다가도 내가 슬쩍 쳐다보면 화면을 보고있는 척 말똥하게 떠있는 큰 눈을 사랑했다. 내가 그를 지금처럼 따뜻하게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연유일 것이다. 실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아주 작은 배려에 대한 기억 때문에.
20살. 넓은 세상을 마주하고 나의 ‘보잘 것 없음’에 골몰히 빠져있던 대학시절,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의 음악을 매일같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별 것도 아닌 인간관계가 그때는 별일처럼 살에 가닿던 시기라, 과시하고 부풀리기 급급한 사람들 속 그들의 음악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솔직하고 가감없는 무언가였다, 약간은 중2병스러운 생각이기도 하지만.
언니네 이발관 5집의 이름은 <가장 보통의 존재>, 보컬 이석원이 낸 책의 제목은 <보통의 존재>였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모순적이게도 나는 특별하지 않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비주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느끼고자 했던 것 같다. 스스로를 그저 그런 사람이라고 여긴 채 발매했던 5집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고, 당시 한국 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 수상작이 된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결국 나를 닮아있다.
자신을 아끼는 만큼 깎아내리기에도 능한 천성이라 한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잔뜩 물러버린 바나나나 계량을 잘못한 미숫가루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해씩 저물면서 느끼는 것은, 분명한 취향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더 근사한 일이라는 거다. 나를 아는 건 평생에 걸친 목표라고 하던데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그것을 좇아 주관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절반의 성공은 아닐까 해서.
얼마 전 만난 친구가 지인을 총망라해서라도 소개팅을 시켜주겠다며 이상형을 물어왔다. 원래 오지랖도 넓고 속정도 깊은 친구여서, 이별 후 매일 헤매는 내가 마음이 쓰였을 거다. 자기만의 관점이 있는 사람이 좋다고 하니 친구는 어떤 대답보다도 헤아리기 어렵다며 고개를 갸웃하더라. 어쩌면 나는 그 어려운 걸 조금은 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오늘 밤은 내가 좋아하는 언니네이발관과 쏜애플의 노래를 들으면서 잠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