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별에는 평생이라는 전제가 깔린다. 평생토록 보지 못할 얼굴, 평생 들을 수 없는 목소리, 그리고 평생을 안고 가야 할 그리움까지. 끝을 짐작할 수 조차 없는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삶이 다하는 동안만큼은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며 상흔을 받아들일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평생을 기대해보고 싶은 사람과 이별을 맞이했을 때도, 무던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순간에도 나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을 또 하나 짊어지고 살기 시작했다. 언제든 이별할 수 있다는 마음, 그러니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도 되는 순간은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 미어질 듯 애끊는 감정도 기약 없는 안녕 앞에서는 이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까지도.
내가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가 우리 아빠만 할 때 외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진현 씨- 하고 불렀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 검버섯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한 두 분이 서로를 이름을 부른다는 게 그때의 나도 퍽 어색하고 생경했는데, 한편으로는 달게 들렸다. 나는 지금도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어린 날 잠결에 머리맡에서 들었던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할아버지는 40년대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키도 크고 풍채도 편편하셨는데, 아빠 옆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할아버지의 뒤통수를 보며 (아빠에겐 비밀이지만) 커서 할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먹성도 좋으셔서 입이 짧은 내가 밥알을 세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고기를 쌈장에 푹 찍어 드셨다. 어린 내가 왜 입맛이 없냐고 타박하셨던 할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손녀처럼 식사를 거르는 날이 많아졌다. 훌쩍 커버린 내가 할아버지에게 약간의 거리감을 느낄 때, 그러니까 이제는 할아버지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 나는 간간히 외갓집을 찾았다. 지하철 하나로 종점까지 쭉 가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고, 나는 그보다 먼 곳도 종종 여행을 다녔지만 늘 그렇듯 바쁘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합리화했다. 할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자꾸 노쇠해지고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명절 연휴 때 하루를 꼬박 함께 있어도, 어떤 때는 하루종일 누워 계셔서 얼굴을 제대로 못 뵈고 왔던 적도 있다. 그래도 내 믿음 안에서 할아버지는 항상 건강하셨다. 그래야 했고, 실은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투영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년 이맘 여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던 사람과 갑작스럽게 이별을 맞이하며 매일을 허덕이던 시기였다.
예상치 못한 이별은 생각하지 못한 후유증을 남겼다. 그 사람 곁에서 잠이 드는 게 일상이었을 땐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려도 눈 뜨는 일이 고역이었는데, 다시 혼자의 삶을 견뎌내고부터는 지금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명확하게 다가올 수 없었다. 함께일 땐 몰랐는데, 이별 앞에 나는 고루한 사람이었다. 그는 떠났고 나는 남겨졌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형체도 없고, 의미는 더더욱 없는 그와 나 사이의 실금 같은 희망이 어찌 됐든 남아있을 거라고 믿었다. 무엇이 그렇게 간절했는지는 몰라도, 그때는 정말이지 그랬다.
어쨌든 그날도 말똥말똥하게 눈을 뜬 채로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시원에 대해 곱씹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출근 전에 나에게 전화를 할 사람이 이제는 가족밖에 없었다. 비가 와서 우산을 챙기라고 하려나,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곧 칠순인 아빠는 서른을 향해가는 날 항상 물가에 내놓은 애 같다고 했다. 저녁은 뭘 먹었냐, 우산은 챙겼냐, 반찬은 있냐. 아빠는 꽤 자주 뜬금없이 전화해서 사사로운 잔소리를 했고, 내가 내 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항상 나를 일갈하는 것으로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것이 우리 부녀의 사랑 방식이니까. 한마디 말에는 백 가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걸 서로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한 마디 말로 백 가지 의미를 이해하는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이야기하려는 아빠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아빠의 옆에는 울고 있는 엄마가 있을 터였다. 부모를 떠나보내는 경험을 먼저 해본 아버지는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겪을 감정의 심도를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저것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오빠가 퇴근하면 같이 차를 타고 저녁에 장례식장에 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뵀던 건 지난 3월. 그날은 할아버지도 몸 상태가 괜찮으셨던지 거실에 앉아 나와 오빠의 근황을 여쭈셨다. 엄마가 사 온 게를 다 같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먹었고,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명절이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윷놀이를 했다. 윷을 던진 할아버지는 네 개의 윷이 뒤집어진 것을 보고 아이처럼 만세를 하며 좋아하셨다. 고개를 돌렸더니 할아버지가 외증조할머니와 함께 찍었던 빛바랜 사진이 보였다. 아주 오래전 앳된 얼굴을 한 할아버지가 동네에서 친구들과 모여 노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윷도 놀고, 제기도 차고, 돌을 던지며 누구보다 개구쟁이 셨을 거다. 도, 개, 걸, 윷, 모. 할아버지의 말이 지엽적인 시간처럼 다섯 칸을 빠르게 앞서갔다.
해를 잊어버린 듯 하늘이 깜깜해져서야 장례식에 도착했다. 검은 상주복을 입은 엄마는 오빠와 나를 보며 고생했다며 이런저런 음식을 내왔다. 나는 갑자기 연차를 썼고, 그저 오빠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실어 여기에 왔으니 사실상 나의 수고는 하나도 없었다. 외려 오늘 하루가 가장 길었을 사람은 엄마였을 테다. 장례식장 안에는 이제는 만나지 못할 사람 덕분에 만나게 된 친척들이 가득했다. “키가 무릎만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다고?”,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다~” 추상적이지만 상투적인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의 공백을 메웠다.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씻지도 못하고 내리 3일을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사실상 타인보다 어색한 친척들과 조금은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어 의외의 유대를 느꼈다. 더는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 만들어준 유대라니. 여우비 사이 내리쬐는 햇빛처럼 장례식에서는 여러 모순적인 사실이 의외의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다들 잠이 들 즈음이면 오히려 나는 말똥말똥해져서 영정사진 앞에 털썩 앉아 그의 눈을 바라봤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주름진 눈가 사이로 호젓한 기개가 느껴졌다. 곰살맞지 못했던 나는 이제라도 솔직하고 싶어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만 슬쩍 내비쳤다.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실은 나도 누군가에게 툭 터놓고 싶은 마음에서.
‘할아버지, 저는 사실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어요. 저를 포함해서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할아버지랑도요. 한때는 엄마와 아빠가 일을 당장 그만둬도 괜찮을 만큼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도 가득했고요, 아직 어리다면 어리지만 이 나이쯤이면 그래도 뭔가 되어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아무것도 되어있지 못한 것 같아서 그게 제일 무서워요.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사셨어요? 할아버지는 두렵지 않으셨어요?‘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투명한 적막만이 가득했다. 밥상에 앉아 젓가락으로 손장난을 하던 내게 ‘어린놈이 입맛이 왜 없어~’하고 고기를 얹어주던 것처럼, 할아버지는 아직 어린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날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껴안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