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없는 세계에서 처음 맞이하는 너의 생일. 용기가 부족한 나는 2월 하고도 한참 지나서, 네가 그토록 좋아했던 봄을 한 뼘 앞두고서야 축하한다는 말을 늦게나마 전한다. 내 오랜 악습관 중 하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땐 정돈되지 않은 채 더듬더듬 말을 잇다 정작 해야 할 말을 놓쳐버린다는 거야. 그리고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겁이 난다는 이유로 이불 밑에 몸을 잔뜩 웅크릴 때도 있었지. 아마 지금도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네.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잘 지낸다’는 흔한 대답이 이렇게 간절했을 때가 있나 싶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평행세계에 있더라도, 볼 수 없고 만질 수는 없더라도 정말 네가 잘 지냈으면 해.
그간 나는 좀 바빴어. 일이 많아서 집에 와서도 늘 일을 놓지 못했고, 그렇게 삶의 방향성이 흐려진다 싶으면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걸까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 같아. 언젠가 이렇게 수십 년을 살아야 한다는 게 정말 막막하고 좀 귀찮기도 해서 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일순간 한 적도 있지만, 우습게도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도 나는 좀 더 잘 살고 싶었던 거야. 이렇게 흘러가다 보면 종착지는 어디일까. ‘행복’이라거나 남들이 흔히 말하는 ‘잘 사는’ 기준에 그다지 집착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그래도 나를 깎고 다듬다 보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드는 아니러니 같은 거. 그래서 나는 한참 동안이나 고민만 했던 퇴사를 입밖에 냈어. 성과가 매일매일 눈앞에 보이는 환경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던 나는 아침마다 다 먹고 찌그러진 콜라 캔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스워지지 않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마침내 나도 도망치는 용기를 냈어. 이게 잘한 선택일까. 비어버린 통장 잔고를 보며 머지않은 시일 내 후회하는 건 아닐까 솔직히 두렵지만 지금은 이게 나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이 드네. 돌이켜보면 네가 떠나던 날도 나는 집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퇴근길이 그토록 아득할 수가 없었는데. 예정에 잡혀있던 운동을 겨우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일을 하기에도 촉박한 시간에 퇴근 후 운동이라는 건 아무래도 나한테 사치라고 씩씩댔던 밤이 아직도 세세하게 기억나. 그때 너는 뭘 하고 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네가 떠난 후 나는 매일 계절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느끼고 있어. 실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토록 생경했나 싶을 정도지. 머물러있는 것을 당연시 여기지 않기 위해 눈에 더 열심히 담으려고 노력해. 퇴근길에 자전거를 타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동그란 달이 끝없이 나를 쫓아올 때, 그리고 그 달 옆에 유독 빛나는 별이 하나 보일 때, 집 앞 주차장 단단한 아스팔트 사이로 삐죽 삐져나온 민들레를 볼 때 그 모든 것에서 나는 너를 보고 느껴. 지나친 의미부여일까. 단단한 틈 사이로 줄기를 틔우고 꽃을 피우는 민들레처럼 너도 조금 더 씩씩하게 견뎌줬으면 안 됐을까 솔직히 어떤 날에는 의미 없는 욕심을 내다가도 결국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이젠 무던한 마음으로 온전히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 이것 역시 거짓말이겠지만, 누군가의 아이돌이 아니라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가 되었을 먼 세계의 네 모습을 매일 상상하며, 오롯한 안녕을 기원해.
네가 떠나고 너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매일 치열하게 살고 있어. 너의 멤버들은 그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네 생일을 같이 모여 축하했고, 네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부르며 애써 눈물을 참지 않았거든. 그리고 너를 알게 되며 파도에 부딪혀가며 다시 모래성을 쌓을 용기를 배웠던 나는, 네가 떠나고 나서야 온 우주의 치열함을 지지대 삼아 살아갈 원동력을 얻고 있어. 그 모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너는 끝까지 나에게 기쁨이라는 걸 여전히 이 지구에서 느끼고 있어. 역시나 사랑받아 마땅했던 너였기에, 나는 너의 죽음보다는 네가 남기고 간 것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빈아, 사후세계라는 게 존재해서 우리가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시간의 속도와 수많은 고통이 더 이상 무력한 공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떠한 이야기든 다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줄게. 네가 바랐던 것처럼 어떠한 부연설명 없이 ‘그냥’ 너라서, 너니까, 더 깊은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