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2.6.14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추앙'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추앙이라는 말은 "높이 받들어 우러른다"는 뜻이다. 사전을 찾아야 알 정도로 일상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 단어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밈으로도 만들어져 돌아다닐 정도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속에서 여자 주인공 미정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이웃집 구 씨에게 사용한 말이다. 여자 주인공은 경기도에 살고 있다. 매일 출퇴근에 4시간을 고스란히 쓰고, 날이 환할 때 퇴근했지만 깜깜할 때 녹초가 되어 돌아가고, 선배에게는 돈 사기를 당하고도 찍소리도 못한다. 직장에서는 촌스럽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무시당하고, 집에서도 언니 대신 주말에 밭일을 해야 한다. 한 번도 존중받지 못한, 한 번도 채워지지 않은 나의 삶이 사랑 정도로는 채워질 수 없다며 나를 추앙해 달라고, 별 관계도 없는 남자에게 주인공이 갈구하면서 사용한 단어다.
미정의 삶은 이제 구 씨의 추앙으로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해방될 것인가? 드라마에서는 이 채워지지 못함의 많은 부분을 경기도에서 사는 탓으로 돌리는 듯하다. 실제로 집에서 한참 떨어진 전철역까지 구 씨의 동행(추앙)으로 고단한 출퇴근길에 활기가 생기고, 표정 없던 미정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그러나 미정이, 우리 많은 젊은이가 경기도에 사는 것이 채워지지 않는 본질적인 이유일까? 경기도는 표피적인 이유다. 그 아래에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행동 양식)이 있다. 즉 미정의 채워지지 못한 삶은 물질주의적 가치관과 이 가치관으로 형상화되는 라이프 스타일과 관계가 있다. 물질주의는 희소한 물질적 가치에 대한 경쟁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경쟁의 결과는 줄 세우기로, 서열로 나타난다. 또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소비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선호하게 만들고, 서울을 문화가 있고, 재미가 있는 '특별한 장소'로 여겨 젊은이들을 서울로 집중하게 만든다. 경기도에 산다는 것은 경쟁에서 낙오된 것이고, 내면의 가치와 생각과 상관없이 촌스럽게 느껴지고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 주요 도시가 봉쇄되면서 러시아산 반값 대게가 대형 마트를 중심으로 쏟아졌다. 상당수 소비자들은 대게 파티를 즐겼지만, 2030 MZ세대를 중심으로 대게 소비는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쟁 자금을 대는 것과 같다며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소비 행위를 통해 정치적·사회적 신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미닝아웃'(meaningout), 나를 위한 가치 있는 소비를 의미하는 '미코노미'(meconomy)인 것이다. 미닝아웃은 이미 2018 트렌드 코리아에 소개된 트렌드로, 우리 청년들은 이미 탈물질주의적 라이프 스타일을 살고 있는데 우리가 이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 것처럼 이제 그런 라이프 스타일에, 삶에 이름을 붙이고 청년들의 대안으로, 당당한 선택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얼마 전 문경 산양면의 베이커리 카페를 방문했다. 이곳은 산양 양조장이라는 산업유산을 재해석해 베이커리 카페로 운영하는데 많은 젊은이가 북적거렸다. 원래 이 양조장은 화수헌을 운영하던 청년들이 오픈한 곳이다. 그들은 단듸랩이라는 영양의 청년들과 함께 작년에는 한옥 카페 연당림을 같이 열어 운영하고 있다. 화수헌은 산양면의 230년 된 고택을 부산에서 온 청년들이 빌려 나만의 감각으로 공간을 꾸미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디지털로 소통, 이를 통해 연 8만 명이 방문하는 핫플이 된 한옥 카페 겸 게스트 하우스이다. 이런 청년들을 우리는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부른다. 지역의 버려지거나 잊혔던 자원에 본인들만의 창의성을 더해 다시 반짝반짝 빛나게 함으로써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세상은 이미 비교의 다름도, 줄 세우기의 나음도 아닌 '다움'의 시대다. 로컬 크리에이터들은 타인의 가치관과 시선으로부터, 타인의 추앙으로부터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다양성을 통해 지방에 문화를, 지역에 활력을 가져오고 있다. 자신의 인생을 추앙하는 나만의 해방일지를 경기도가 아닌 경상북도에서 그들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청년들이 강물처럼 넘치는 경상북도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