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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람 Dec 08. 2017

#1. 엄마의 신발과 트롬본

비에 젖은 신발 덕분에 들어간 밴드부

꿈을 만난 순간의 기억.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수많은 기억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꿈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품은 기억. 음악을 꿈으로 만난 그 날들. 그 기억을 꺼내봅니다. 그리고 그 찬란했던 순간을 다시 살아봅니다.


#1. 엄마의 신발과 트롬본


늦은 봄이었다. 그날도 학교 운동장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작은 숲을 이루고, 그네와 시소 같은 몇 개의 놀이기구가 그 숲과 운동장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는 며칠째 계속되어 운동장과 놀이기구 사이에 꾸불꾸불 뱀 모양의 시내를 여러 개 만들었다. 나는 우산도 쓰지 않고 장화도 신지 않은 채 그 시냇물 사이를 넘어 다니며 둑을 만들고 있었다. 내 옆엔 두 명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들도 각자 둑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흙을 쌓아 올려 둑을 만들었다. 웃음을 터뜨리거나 환호성을 지를 만큼은 아니지만 그건 재미있는 놀이였다. 우리는 각자 흙을 만지고 그것을 쌓아 올려 둑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아주 진지한 일이었다. 빗물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작은 시내에 모여든 빗물이 넘치지 않도록 주변을 높이기도 했다.


어떻게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놀이에 빠져서 나는 시간 같은 건 완전히 잊어버렸다. 시간뿐이 아니었다. 내 옆에 있던 두 명의, 어쩌면 한 명일지도 모르고 세 명일지도 모르는, 여자아이들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아이들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옆에 누군가 있었다는, 그리고 그게 여자아이들이었다는 막연한 느낌뿐이다. 


물이 흘러 내가 서 있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잘 만들어진 둑과 제방이 제구실을 하고 있었다. 물의 흐름은 느렸지만 운동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꽤 빠른 편이라는 생각이 들만큼의 속도였다. 배수 시설이 잘 되지 않았던 당시의 운동장엔 며칠간 계속된 비 때문에 많은 물이 그렇게 낮은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둑을 만들었는지, 이미 비는 그쳤지만 머리카락과 겉옷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나는 온통 젖어있었다. 신발엔 물이 가득 차서 걸을 때마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에 돌아와서 따뜻한 부뚜막에 신발을 올려놓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신을 수 없을 만큼 젖은 상태였다. 나는 신발이 하나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학교에 신고 갈 수 있는 신발이 딱 하나 있긴 했다. 주황색 천으로 만든 그 신발은 경사진 고무 밑창이 달려있었고, 뒤쪽이 5cm 정도 높은 여자 신발이었다. 내 발에 맞는 남아있는 유일한 신발은 어머니의 신발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신발이 젖었다고 학교에 가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신발을 신고 학교로 걸어갔다. 학교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다. 걱정했지만 아무도 내 발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5cm 정도 키가 크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힘이 강해진 것 같기도 했고, 나이가 든 것 같기도 했다. 걸음걸이는 약간 어색했지만 그건 나만 느끼는 것이었고, 뭔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한 단계 강력해진 무언가가 내 기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바로 전에 브라스밴드에 지원할 학생은 중앙현관으로 오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건 이미 3일 전부터 들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브라스밴드가 뭔지도 몰랐고 어차피 교사들의 목소리에는 집중하지 않는 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지원’ 따위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담임교사의 생각은 달랐다. 브라스밴드는 개교 이래 처음 만들어지는 데다가 아무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5~6학년 전체가 반에서 4명 이상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군대식 차출이 시작되었다. 한 줄에 1명씩 할당이 주어지고, 지원이 불가능한 사람을 빼기 시작했다. 우선 여자애들이 빠졌다. 브라스밴드는 남자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몸이 아프다는 몇 명이 빠졌다. 나팔을 불면 폐가 나빠진다는 엄마의 말씀을 진지하게 전달한 한 녀석이 제외됐고, 덩달아 호흡기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 몇 녀석이 같이 빠지게 됐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게 언제나 어려웠던 나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밴드부가 뭔지 알고 싶어 하는 약간의 호기심 사이에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최종 4명 중 한 명이 되어 중앙현관으로 가야만 했다. 


중앙 현관 안쪽은 언제나 어두웠다.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짧은 학교의 역사가 한쪽 벽에 기록되어있었고, 반대편엔 각종 트로피와 상장들이 진열되어있었다. 로비 같은 작은 공간이 그 사이에 있었다. 현관 반대편엔 건물 뒤쪽으로 연결되는 문이 있었다. 


5~6학년 각 반에서 반강제로 차출된 20명 정도의 남자아이들이 거기 모였다. 잠시 후,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음악 교사가 흰색의 짧은 지휘봉을 들고 나타났다. 


“4열 종대. 키순으로.”


자발적으로 지원한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느리게 줄을 만들었다. 4명씩 줄을 맞춰 서라고 했지만 인원이 맞지 않았다. 첫 줄엔 3명뿐이었고 둘째 줄은 6명이 서 있었다. 다른 줄도 정리가 필요했다. 


“너, 키 큰 녀석이 왜 거기 있어? 맨 앞으로 나와.”


적당히 섞여서 중간에 서 있던 나는 맨 앞줄로 불려 나갔다. 그리고 인원을 맞추고 남은 3명은 교실로 돌아갔다. 그 아이들은 모두 키가 나와 비슷했다. 하지만 엄마의 신발을 신고 온 건 나뿐이었다. 엄마의 신발 덕분에 그날따라 키가 몹시 컸던 나는 그렇게 제일 앞줄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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