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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람 Dec 22. 2017

#3. 혼자 남은 운동장

태권도를 시작하게 된 이상한 동기

꿈을 만난 순간의 기억.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수많은 기억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꿈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품은 기억. 음악을 꿈으로 만난 그 날들. 그 기억을 꺼내봅니다. 그리고 그 찬란했던 순간을 다시 살아봅니다.


#3. 혼자 남은 운동장 


내가 밴드부에 들어간 건 엄마의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기 때문이고, 그건 비 오는 날 운동장에서 물놀이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운동장에서 혼자 놀던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난 항상 운동장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 나를 봤다면 외롭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딱히 외롭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타고난 외톨이도 아니었다. 친구도 적당히 있었고 왕따를 당한 적도 없었다. 집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나서 얼마 후 초등학교 교사 일을 그만뒀다. 그러니까 매일 방과 후에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어야 했던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셈이다.


그냥 앉아있었다. 아마도, 뭔가 생각을 하긴 했을 테지만, 그게 뭔지는 기억에 없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메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스탠드 맨 윗줄에 앉아 생각에 빠졌고, 어머니는 날마다 집에 오지 않는 나를 찾으러 학교에 왔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운동장에는 태권도부의 연습이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저 우연히 스탠드에 앉은 나와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태권도부가 같은 시간에 내 어머니의 시야에 들어왔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걸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날마다 방과 후에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게 태권도부에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어머니는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나를 태권도부에 들어가게 했다. 어쩌면 내게 물어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기억에 그런 장면은 떠오르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보이는 장면은 내 이름을 부르며 학교 운동장으로 걸어오는 어머니와 멀리 보이는 태권도부의 기합 소리가 만들어내는 부자연스러운 조합뿐이다. 아무튼, 어머니는 나를 태권도부에 넣었고, 나는 그게 싫은지 좋은지도 말하지 못하는 소심한 어린이였다.

https://twitter.com/JesusEtaekwondo

태권도를 해야 했던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건 미군 부대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친구의 소식을 듣고 난 이후에 생긴 것이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미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였다. 그분에게 미국은 ‘어느 모로나 부족함이 없는 나라’였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제법 안정된 그분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그 집 아이들은 우리 삼 남매와 비슷한 또래였다. 나는 4살 위의 형과 6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두 살 터울의 작은 형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병을 앓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정기적으로 미국에서 어머니 앞으로 편지가 왔다. 아버지의 친구, 그분의 부인은 어머니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편지는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고 어머니가 그 아주머니에게 답장을 보냈다. 아주머니는 편지 속에 한두 장씩 사진을 함께 보내곤 했다. 언제나 그 편지에는 미국에서의 아름다운 생활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편지를 받으면 우리에게 소리 내 읽어주었다. 어머니가 편지를 읽으면 우리 3남매는 사진을 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두 명의 사내아이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젖소처럼 커다란 얼룩무늬가 있는 키가 작은 말을 탄 모습의 사진이 지금도 기억난다. 


미국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아버지의 친구에겐 딱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건 아이들이 덩치 큰 미국 애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언제나 걱정이 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에게 아이들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미국에 오려면. 


그랬다. 아버지는 미국 이민을 준비 중이었다. 그리고 형과 나는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했다. 그게 우리 형제의 유일한 준비사항이었다.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매일 운동장에 앉아서 태권도부의 연습을 구경하는 내 모습이야말로 딱 필요할 때 나타난, 운명적인 순간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운명적’으로 태권도부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태권도 연습을 했고, 연습이 끝나면 여전히 스탠드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시간,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뭔가를 생각했다. 태권도를 시작한 이후로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찾으러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나는 비가 오는 운동장 한구석에 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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