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내지 못하는 오르간과 베토벤
꿈을 만난 순간의 기억.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수많은 기억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꿈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품은 기억. 음악을 꿈으로 만난 그 날들. 그 기억을 꺼내봅니다. 그리고 그 충만했던 순간을 다시 살아봅니다.
둘째 형은 내가 다섯 살 때 죽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장례를 치렀다. 아버지는 그 당시 군수물자를 취급하는 미국 회사 직원으로 베트남에 가 있었다. 아들이 죽었다고 하루 만에 귀국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비행 편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망 소식과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한동안 집에 올 수 없었다. 한 달 만에 아버지는 귀국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그 한 달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이가 죽은 슬픔에 빠져 있었음에도 남편을 만나는 게 너무 기뻤다고 한다. 본인도 스스로 미친 게 아닐까 걱정을 할 만큼 커다란 기쁨이었다고 했다. 슬픔이 너무 커서였을까, 자식을 잃은 엄마들이 흔히 느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일을 겪은 30대 중반의 젊은 여성. 어머니가 외로움과 절망과 비탄 속에서 감정적으로 혼란을 느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집에 연못을 만들었다. 큰 돌로 둘레를 장식한 작은 연못 한가운데 아담한 분수가 있었다. 맑은 날이면 분수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가끔은 마당에서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마리 물고기를 키웠다. 어린 잉어 몇 마리가 죽지 않고 잘 자랐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식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3명의 사내아이가 시끄럽게 뛰어놀던 그 집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새로운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먼저 간 아이를 잊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내겐 6살 터울의 동생이 생겼다. 여자아이였다.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형과 서로 업어주겠다며 싸우곤 했다. 우리 가족 모두 새로 태어난 동생을 사랑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낡은 사진 속에 있는 다부진 표정의 소년이 우리 가족이었다는 설명을 듣지 전까지는 나는 둘째 형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내가 둘째 형과 함께 했던 기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내게 둘째 형의 상실은 마치 역사책 속에 기록된 사건처럼 무감각한 사실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건 엄밀히 상실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을 경험한 뒤에야 알았다. 어머니가 겪었을 상실의 아픔을, 그 깊이를 설명할 수 없는 상처를.
둘째 형이 가고 동생이 오고, 마당에 분수와 연못이 만들어지고 기르던 강아지가 사라졌다. 모든 게 그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머니는 곧잘 노래를 불렀다. 집에는 방바닥에 앉아서 연주하는 뚜껑이 달린 전기 오르간이 있었다. 모터를 돌려 바람을 일으키고 그 바람이 리드를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기계식 악기였다. 큰 여행 가방처럼 생긴 오르간 건반을 어머니는 두 손으로 눌러 소리를 냈다. 오르간에 달린 작은 보면대에 악보를 올려놓고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큰일을 겪고 나서 오르간은 오랫동안 다락에 갇혀있었다. 몇 년간 크림색 가방 모양의 오르간은 소리를 내기 않았다.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후 다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베트남에서 완전히 돌아왔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가족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 이상 해외에서 근무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또다시 어머니 혼자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어린 막내딸이 성장하는 것도 가까이에서 봐야만 했다. 하지만 사업은 아버지의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동생은 5살이었고,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해에 아버지의 사업은 빚만 남긴 채 끝나버렸다. 집을 팔아야 했다. 집과 함께 아픈 기억도, 그 아픔을 치유하려고 만든 모든 것들도 같이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중학교 앞에서 문구점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새 터전에 아버지의 실패한 사업이 남긴 짐이 같이 왔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 음반이었다. 대체 아버지는 트로트가 전성기를 이루고 트윈폴리오가 인기를 누리던 그 시기에 왜 클래식 음반 사업을 벌인 걸까? 그렇게 현실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남들보다 한발 앞서 클래식 음반 시장을 개척하려던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처럼 팔리지 않은 음반은 존재의 이유가 불분명한 채로 이삿짐에 딸려 온 것이다. 문구점과 연결된 살림집 거실 구석에는 9장으로 구성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 내 키보다 더 높이 쌓여있었다. 싸구려 나무로 만든 마루가 깔린 거실은 난방이 되지 않아서 겨울이면 마치 냉장고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추웠다. 그 싸늘한 공기가 만든 얼어붙은 풍경 속에 팔리지 않은 클래식 음반이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다.
새집은 거실과 방 2개, 그리고 연탄을 피우는 구식 부엌이 전부였다. 그나마 방 하나는 작은 숙부가 사용했다. 평양에서 피난 와 자리를 잡은 친할아버지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뒤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함께 가시고 말았다. 그렇게 일찍 부모님을 여읜 아버지의 4형제는 끈끈한 형제애를 발휘했다. 가난을 이겨내고 큰 숙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셋째 동생인 우리 아버지가 같은 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왔다. 큰 숙부와 우리 아버지는 힘을 합쳐 막냇동생을 보살폈다. 형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을 마친 막내 숙부는 큰 숙부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하지만 큰 숙부가 이혼하고 재혼을 하며 새로 들어온 형수에게 눈칫밥을 먹다가 그만 쫓겨나듯 집을 나오고 말았다. 작은 숙부가 갈 곳은 우리 집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3남매는 문구점에 바로 연결된 작은 방에서 함께 생활해야 했다. 얇은 창호지를 바른 구식 미닫이문이 문구점과 방 사이에 있었다. 그 방에는 분수와 연못이 있던 집에서 가져온 가구와 살림이 가득했다. 우리 다섯 식구는 그 방에 이불을 깔고 함께 생활했다.
문구점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빚을 갚기 위해 아버지는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이번엔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지원병으로 구성된 사우디아라비아 방위군은 군수 물자 운영을 미국 회사에 위임했다. 미국의 군수회사는 임금이 싼 동양인 직원을 필요로 했고 아버지는 주한 미군 부대와 베트남에서의 경험 덕분에 높은 경쟁을 뚫고 취업할 수 있었다.
커다란 여행 가방에 짐을 싸고 아버지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한 번 더 가족들을 떠났다. 미국 이민에 대한 꿈은 사라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대신 가족은 물론 친구도 없는 곳으로, ‘어느 모로나 부족함이 없는 나라’ 대신 술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쉽지 않은 나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아마 아버지는 그 후로 23년이나 그곳에서 생활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년에 2개월. 우리 가족이 아버지와 함께 생활한 시간은 20년 동안 매년 2개월뿐이었다. 그건 다 합해도 3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다.
어머니의 노랫소리는 다시 멈췄다. 아버지의 베토벤 음반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운동장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슬람 국가 가운데서도 가장 보수적으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는 종교 율법에 따라 술을 전혀 마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