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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람 Jan 19. 2018

#6.소리가 나지 않는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 있는 풍경

여기는 이 음반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꿈을 만난 순간의 기억.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수많은 기억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꿈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품은 기억. 음악을 꿈으로 만난 그 날들. 그 기억을 꺼내봅니다. 그리고 그 충만했던 순간을 다시 살아봅니다.


#6. 소리가 나지 않는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 있는 풍경


따뜻한 아랫목에서 가족들과 함께 이불 속으로 다리를 뻗고 앉아 먹던 군고구마. 아버지에게 보낼 카세트테이프를 만들기 위해 윷놀이를 하며 우리 3남매의 목소리를 녹음하던 순간. 멀리서 찾아오던 친척들과 어머니의 친구들. 형과 함께 무거운 가게 덧문을 닫던 시간.


빠르게 지나간 그 시절에 나는 궁핍함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설사 궁핍함을 느꼈다고 해도 지금 기억 속에 그런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따스한 기억이 훨씬 많이 남아있다. 아프거나 슬픈 기억은 애써 찾으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아이들은 어른들만큼 현실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이거나, 어른들이 느끼는 현실 속 어려움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드러난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언제나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니까. 하지만 어른들이 느끼는 현실 속 결핍감은 아이들에게 전염된다. 


내게 그런 결핍감은 관계에서 드러났다. 아버지의 부재. 친구로부터 느끼는 열등감.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사춘기에 그런 감정들은 나를 더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어갔다. 더 내성적인 사람이 된다는 건 꽤 부정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건 한쪽 면만을 보고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시각으로만 보면 언제나 현실로 드러나는 것만이 중요한 법이다. 어쩌면 그런 시각이란 오직 보이는 현실만을 인정하는 건지도 모른다. 보이는 현실 이전의 작용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무시된다. 하지만 보이는 현실 이전의 작용이 없다면 현실은 존재하지 못한다. 내성적인 성격의 긍정적인 면은 그런 작용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점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으로, 그렇게 된다고 해서 내가 그 작용에 개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성적인 성격이 깊어지는 동안, 그런 변화를 직접 알아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좀 더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많아졌다. 생각 속에는 현실보다 현실이 아닌 것이 더 많았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 음반은 부모님에게는 실패의 흔적이었을지 몰라도 내겐 거실 한쪽을 차지한 조금 불편한 짐에 불과했고 그보다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아무도 없는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거실에 쌓여 있는 그 짐을 열어보기로 했다. 거실 창으로 손바닥만 한 햇살이 들어오는 따스하고 조용한 시간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베토벤의 얼굴이 인쇄된 표지는 검정색이었다. 9장이 똑같은 표지에 하나씩 따로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9장은 크고 딱딱한 종이 케이스에 담겨있었다. 그 케이스에도 베토벤의 똑같은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처음 그 케이스를 열어봤을 때, 나는 똑같은 9장의 음반이 왜 한 묶음으로 다시 포장되어 있는지 의아했다. 표지에 인쇄된 글씨를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9장은 모두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9장을 구분하는 건 1번부터 9번까지의 작품번호와 거기에 붙어 있는 영어로 된 기호뿐이었다. A부터 F까지 6개의 알파벳이었다. C, D, F가 두 번씩 있었다. C와 D는 한 번은 대문자로 한 번은 소문자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B와 E에는 b이 붙어 있었다. 소문자 b처럼 생겼지만 그건 다른 문자처럼 보였다. 그 알파벳 6개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왜 중복된 알파벳이 있는지, 대문자와 소문자로 구분된 이유가 있는지 혹은 단순히 실수인지도 몰랐다. 그냥 A에서 I까지 9개의 문자를 쓰면 편했을 텐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주변엔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일부러 누군가에게 물어볼 만큼 호기심이 큰 것도 아니었다.

검정색 표지 안에 들어 있는 플라스틱 음반을 꺼내봤다. 하얀 종이에 다시 포장된 음반은 보기보다 묵직했다. 표면은 반짝거렸고 뭔지 알 수 없는 좋은 냄새가 났다. 동그란 LP 음반의 가운데에 내 새끼손가락보다 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을 중심으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원형 종이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도 표지에 있는 것과 같은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음반 9장을 모두 꺼내봤다. 같은 냄새가 났다. 9장을 한 번에 담는 단단한 하드 케이스와 각각의 음반이 담긴 검정 표지, 그리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LP 음반이 거실 바닥에 펼쳐졌다. 


여기는 이 음반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 거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건 클래식 음반이라서가 아니라, 베토벤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새것이라서 느껴지는 이질감 같은 것이었다. 우리 집엔 새것처럼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낡은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검정 기왓장도 색이 바래서 회색으로 보였다. 가게와 연결된 방문은 나무 창살에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이었다. 열고 닫을 때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실 쪽으로 난 또 다른 문은 폭이 좁았다. 벽지를 발라 놓은 문은 아주 약해 보였다. 싸구려 철물 손잡이를 달아놓은 여닫이문이었다. 거실에는 예전 집에서 가져온 소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집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던 소파가 새집에서는 왠지 더 낡아 보였다. 주위 환경에 따라서 피부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그 소파도 새로운 환경에 맞춰서 자신을 더 낡아 보이도록 변신을 한 것 같았다. 거실에서 신발을 신고 높이가 50cm는 족히 되는 계단 2개를 내려가는 주방에는 연탄을 사용하는 부뚜막이 2개 있었다. 부뚜막 위로 황토색 페인트를 대충 바른 선반이 있었고, 구석에는 같은 색으로 칠한 3단짜리 찬장이 있었다. 찬장 맨 위 칸에는 어머니가 아끼는 도자기 찻잔 세트가 일부러 숨겨 놓은 것처럼 다른 그릇들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혼수였던 그 찻잔 세트는 흰 바탕에 붉은 장미가 그려진 일본 제품이었다. 


온통 낡은 것들로 만들어진 곳에 어울리지 않는 새 음반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숨죽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 어디에도 턴테이블은 보이지 않았다. 턴테이블을 본 건 3년 뒤 새로 이사를 하면서다. 그동안 그건 신문지로 꽁꽁 싸인 채 숙부가 사용하는 방에 딸린 다락 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어머니의 찻잔 세트와 아버지의 턴테이블은 이 집에서는 자신의 역할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햇빛 속으로 나와 자신들의 역할을 되찾을 때까지, 나는 베토벤의 음악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음반들은 3년 동안 조금씩 사라져 갔다. 일부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고 일부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가져갔다. 또 일부는 숙부가, 또 다른 일부는 이름 모를 친지들에게 갔다. 그리고 햇빛에 겉이 바랜 일부는 쓰레기로 버려졌다. 


3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다시 이사를 한 뒤, 나는 처음으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었다. 그때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베토벤이 작곡한 지 100년이 훨씬 넘은 교향곡은 우리 아버지의 손에서 또 하나의 음반으로 만들어졌고, 공장에서 포장되어 우리 집 거실에 쓸모없는 짐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소리가 되어 내게 전달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위대한 천재의 음악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지루한 음악이었다. 15살 소년에겐 베토벤 말고도 관심거리가 넘쳐났고, 그때는 존 덴버가 무더운 여름 새벽의 상쾌한 바람처럼 내 안에서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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