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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람 Jan 26. 2018

#7. 사라진 어머니의 오르간

동생의 피아노 가정교사

꿈을 만난 순간의 기억.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수많은 기억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꿈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품은 기억. 음악을 꿈으로 만난 그 날들. 그 기억을 꺼내봅니다. 그리고 그 충만했던 순간을 다시 살아봅니다.


#7. 사라진 어머니의 오르간 


아버지가 보내주는 월급은 당시로써는 꽤 큰돈이었다. 어머니는 검소한 생활을 계속 이어가며 빚을 갚고 조금씩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형편이 나아지자 어머니는 거실에 피아노를 들여놨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정색 피아노였다. 어머니는 막내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었다. 내 동생은 7살이 되면서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사립초등학교에 다닌 우리 형은 바이올린을 했었다. 형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우리가 분수 연못이 있는 집에 살 때였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형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바이올린을 그만뒀다. 문구점 집으로 이사한 뒤에도 집에는 검정 하드케이스에 담긴 어린이용 바이올린이 있었다. 어머니가 아끼던 3단짜리 자개장이 방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에 뽀얗게 먼지가 앉은 바이올린 케이스가 있었다. 

동생의 피아노는 우리 가족의 환영을 받았다. 모든 것이 낡고 빛을 잃은 집에서 커다란 업라이트 피아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어머니는 오르간 대신 피아노를 연주했다. 동생은 이제 막 바이엘을 시작했다. 동생의 피아노 악보에는 곡마다 볼펜으로 그려진 하트가 몇 개씩 있었다. 연습한 횟수만큼 하트를 그렸다. 나는 진도가 느린 7살짜리 동생 옆에 볼펜을 들고 앉아서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다. 동생이 한 번을 끝까지 치고 나면 내가 대신 하트를 그려 넣곤 했다. 가끔은 그 역할을 형이 하기도 했고 어머니가 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동생의 연습을 확인하는 건 내 임무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피아노를 한 번도 쳐본 적이 없는 나는 동생의 피아노 연습을 감독하는 가정교사였다. 동생은 그 후로 5년 넘게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동생이 피아노를 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너무 엄격한 가정교사 때문에 흥미를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때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동생의 연습을 지켜보던 나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갈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형은 바이올린을 했고 동생은 피아노를 배웠지만 나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박탈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 집에 들여놓은 피아노는 오랫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이나 우리 집에 있었으니, 최소한 10년 정도는 한 가족처럼 지낸 셈이다. 


피아노가 들어오기 전부터 어머니의 오르간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노래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을까? 지금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오르간은 우리와 함께 새집으로 오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3남매가 모르는 사이에 팔아버렸는지, 그냥 쓰레기처럼 버렸는지, 아니면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분실했는지도 모른다. 오르간이 사라지고 피아노가 들어오기까지 대략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집에는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행한 일들이 연속해서 이어지고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을 떠났다. 어머니는 혼자 문구점을 운영하며 3남매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빚을 갚아야 했고, 살림을 해야 했으며, 어린 막내딸을 보살펴야 했다.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에 다시 한번 남편 없이 혼자 가족을 돌보는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어머니에게는 10년 전의 일들이 각인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때도 아버지가 해외에 있었고 어머니 혼자 가족을 돌봤으며 어린 아들을 잃었으니,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막내딸을 지키고 또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에 오르간은 거추장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혹은, 오르간이 비극을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지만 오르간이 사라졌다고 어머니의 트라우마가 치유된 건 아니다. 그건 마치 운명처럼 계속되었다. 또다시 10년이 2번 지나고 내 동생은 남편을 잃었으니까. 그리고 그 상처가 어머니 가슴에 한 번 더 깊숙이 피 흘리게 만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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