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람 Feb 02. 2018

#8.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성당

꿈을 만난 순간의 기억.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수많은 기억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꿈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품은 기억. 음악을 꿈으로 만난 그 날들. 그 기억을 꺼내봅니다. 그리고 그 충만했던 순간을 다시 살아봅니다.


#8.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성당


민준이는 브라스밴드에서 클라리넷을 불던 친구다. 자발적으로 밴드부에 지원한 그 친구는 클라리넷을 부는 4번째 줄에 서야 할 만큼 키가 작은 편이었다. 민준이는 다른 악기들도 잘 다루었다. 밴드부에 지원할 정도로 악기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민준이는 음악에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운지법이 다른 프렌치 혼과 트럼펫을 불며 내게 그 차이점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클라리넷의 리드를 깎는 방법도 알려줬다. 나도 트롬본의 슬라이드를 움직이며 음정을 맞추는 법을 알려줬다. 물론 민준이는 트롬본의 연주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양쪽 눈꼬리가 15도 정도 아래쪽으로 쳐진 민준이는 보이는 것보다 장난기가 많은 친구였다. 나는 민준이와 어울리는 게 좋았다. 함께 탁구를 치기도 했고, 민준이와 똑같은 눈을 가진 민준이의 형과 아버지가 있는 집에도 놀러 갔다. 일요일에도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우리 집과 달리 민준이는 일요일이면 성당에 가야 했다. 나는 교회나 절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서 뭘 하는지는 도통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민준이가 성당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관심이 없었다고는 해도 죄를 지으면 신의 벌을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벌을 내리는 무서운 신을 만나러 가는 일은 당연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죄라고 할 만한 일을 했던 기억은 없었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성당에서 만난 신이 그 죄를 들춰내서 벌을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밖에서 기다려.”


내가 성당에 가는 걸 망설이자 민준이는 예배가 끝나고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산 중턱에 있는 성당 주변은 시멘트로 깔끔하게 포장된 넓은 길이 반듯하게 이어진 동네였다. 부자들만 산다는 그 동네는 처음이었다. 맑은 날씨였다. 일요일 아침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 동네 구석구석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강아지 몇 마리가 산책을 하고 있었고, 성당에 가는 사람들 말고는 대부분 집에서 늦은 아침잠을 자고 있는 듯 조용했다. 


성당 입구는 좌우로 폭이 넓은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계단 아래서 보면 성당은 실제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입구에는 커다란 나무문이 달려있었다. 높이가 상당했다. 사람이 드나드는 용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아주 큰 문이 4쌍이나 되었다. 


예배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민준이도 사람들과 섞여서 성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계단 위에 혼자 남아 민준이를 기다릴 참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배시간에 늦은 사람들 몇 명이 계단을 뛰어오는 게 전부였다. 성당 문이 닫히자 갑자기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고요 속에 서 있는 게 마치 세상에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때 성당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소리는 이어지다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굳게 닫힌 성당 문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게 노래라는 걸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 곡조도 불분명하게 들렸다.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한 노랫소리는 아지랑이처럼 혹은 연기처럼 실체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소리를 더 잘 들어보려고 문틈에 가까이 귀를 대고 있었다. 그때 노크도 없이 갑자기 문이 열렸다. 민준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아빠가 너 데려오래. 들어올래?”


원래 그렇게 움직이도록 되어있었던 것처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민준이를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로비처럼 사용하는 작은 공간이 있었고 또 다른 문이 거기 있었다. 민준이가 그 문을 열고 내게 들어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안에는 나무로 만든 긴 의자가 가득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이 현실감 없는 그림처럼 보였다. 여자들은 머리 위에 하얀 천으로 만든 손수건 같은 것을 올려놓고 있었다. 사람들 머리 위로 멀리 제단이 보였다. 제단 가운데는 성당 문보다 더 키가 큰 십자가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는 한 남자가 매달려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옷을 거의 다 벗은 모습이었다. 그 십자가 아래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목도리 같은 것을 어깨에 두르고 서 있었다. 그 남자 옆으로 내 또래로 보이는 2명의 사내아이가 역시 흰옷을 입고 서 있었다. 민준이가 내 손을 잡고 가족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성당 양옆에는 색유리가 끼워진 창문이 있었고 그리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민준이와 같은 눈을 한 민준이의 아버지와 형이 그 햇빛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커다란 오르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소리였다. 오르간의 낮은음이 내 가슴과 배에 출렁이는 진동을 일으켰다. 동시에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낯선 광경에 적잖이 당황했다. 민준이를 따라 일어섰지만 처음 듣는 노래를 따라 부를 수는 없었다. 노래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같은 곡조에 가사를 달리해서 몇 번을 부르고 나서야 노래는 갑자기 멈췄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 영세받지 않은 사람이 나오면 큰일 난다.”


갑자기 민준이가 식구들과 함께 제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성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제단으로 가서 흰옷을 입은 남자에게서 뭔가를 받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해보려고 애썼지만 전혀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영세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처음 겪는 일이었고,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을 매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는 거대한 오르간 소리에 압도되었다. 그건 마치 신의 목소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신의 목소리를 따라서 사람들은 노래했다. 신을 따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영세를 받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은 왠지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을 벌하는 무서운 신의 집에 다시 가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날 이후로 다시 성당에 가는 일은 없었다. 몇 년 후 우리가 그 동네로 이사를 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 성당에 나가기 전까지는.



*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계없는 이미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7. 사라진 어머니의 오르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