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에는 선산 묘지에 남자 친척들이 다 모이기로 한 날이니 너도 오너라"
주초 아버지의 통보에 네 알겠습니다 넙죽 대답했으면서도 내 마음속엔 스멀스멀 이성의 물음표가 꼬리처럼 달라붙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제사나 성묘라는 의식 자체에 물음표가 있는 사람이다.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 가족의 건강과 무운을 비는 세레모니얼한 의식임을 감안하더라도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망자의 무덤, 아니 정확히는 흙더미에 절을 두 번 하는 행동이 현생의 나에게 어떠한 행복을 갖다 줄 것인가? 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도 예외 없는 지독한 T형 인간..) 종손이니 장남이니 하는 권리 없이 책임감만 지워주는 타이틀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역사가 있던 나란 말입니다..
어쨌건 오늘은 증조할머니를 모신 선산 무덤에 '떼를 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난 처음에 아버지가 언급하신 '떼'라는 단어가 무슨 방언이나 혹은 외래어인 줄 알았는데 엄연히 국어사전에도 있는 말이었다.
명사
: 흙이 붙어 있는 상태로 뿌리째 떠낸 잔디.
증조할머니 묘소의 봉분에 풀들이 다 죽어서 무덤이 너무 볼품없어지고 있다고 일종의 비정기적 케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하셨다. 사실 사람을 불러서 돈을 주고 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웬일인지 작은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이 직접 모여 작업하는 게 어떠냐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알고 보니 우리를 소집하기 바로 그 전 주 여느 밤에 할머니가 꿈에 나오셨다고 했다.
장남이자 종손인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할머님과 부모님까지 2대를 이어 모신 이곳은 양주의 ㅇ공원이었다. 사실 나에게 이곳은 1~2년에 한번씩 아버지를 따라 휠렐레 팔렐레 산책처럼 갔던 공간이었는데, 왜 아버지께서 힘 쓸 남자가 여럿일수록 더 좋겠다고 하셨는지는 오늘의 노동이 시작되고서 깨달았다. 차가 닿지 않는 산 중턱의 묘소로 각종 기구와 대형 생수 말통 4개를 들고 이동하는 자체부터 장난이 아닌것이었다(!). 한편으로 '떼를 심는' 행위를 논에 모내기 정도 하겠구나 간단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일단 가물고 건조해져 단단한 돌처럼 굳어버린 흙을 삽으로 부숴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더구나 막 부숴도 안되고 봉분의 겉 부분을 층마다 딱 한 줄씩만, 잔디를 심을 자리를 평평하게 다지며 올라가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집을 나섰으므로 대충 점심 전에 끝나리라던 내 예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는, 삽질을 시작한 지 1시간이 되자 겨우 한 층을 완료하는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비 오듯 흐르는 등 뒤의 땀샘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이 작업이 우리 가족의 현실 행복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했다. 우리 가족 중 오늘 현장에 출동한 5인의 남자들은 그 누구도 내 머릿속 질문에 관심이 없다는 듯 열심히 각자 맡을 업무를 꿋꿋하게 펼쳐갈 뿐이었다.
어느새 3시간 쯤 흘렀을까. 처음에 서투르던 내 삽질 솜씨도 점차 본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5시간 정도 흐르고, 우리가 목표한 완성된 모양의 봉분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왠지 모를 뿌듯함과 희열감이 올라왔다. 같이 고생한 가족들과 준비해 간 떡이며 식혜 등등(집에서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이다)을 같이 나눠먹으니 마치 농번기 농촌에서 함께 일을 마친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쉬는 날 이렇게 함께 와준 나와, 사촌 동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문득 할머니께서 오랜만에 꿈으로라도 등장하셨던 것도 결코 자신의 봉분이 초라해져서 아픈 마음이 아니라, 코로나를 핑계로 얼굴 볼 기회도 잃어버린 친척, 가족들끼리 모여서 막걸리 한잔, 갈비탕 한 그릇 나눠먹고 안부 묻길 바라는 마음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떼를 심어야 한다는 건 어쩌면 여전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가족 친척들에게 가족이라는 근본을 잊지 않도록 마음속에 꼭꼭 눌러 담아 주시려는 할머니의 마음 그 자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계셨을 적 늘 하시던 그 말씀 그대로 저 깊은 땅 속에서도 우리를 걱정해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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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당신은 나더러 본인이 죽거든 꼭 이곳 장지에 묻어달라고 하시곤 했다. 오늘도 하산길 어드매에서 나를 불러 멈춰 세우더니, 모르는 어떤 가족이 모셔진 공간을 예시로 말씀을 이어가셨다.
"요즘엔 여기 공원묘지도 다 차서 새로 받아주지 않는다. 나중에 내가 죽고 네가 집안의 의사결정권자가 되면 가족들을 모아서 (아버지 당신을 포함하여) 공동 장지로 만들 것도 고려해보거라."
대체 죽은 뒤의 일에 무슨 의미가 있냐며, 누가 요새 장지로 모시냐며.. 반문의 문장이 우르르 떠올랐지만 그 중 하나 미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어쩌면 그런 불평의 알고리즘 단계 어디 쯤 아버지를 이해하는 버튼이 하나쯤 슬몃 심어진 게 아니려나. 내가 지금의 아버지 나이쯤 되면 그땐 나도 당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까? 많이 두렵고 멀게 보이는 그 순간이 된다면 어찌 당신의 마음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