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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Soobin May 24. 2022

영감은 영감을 찾지 않을 때 나타난다.

"아 뭐 쓰냐 진짜”


요즘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다. 독립출판을 준비하고 있어서다. 올해 꼭 내기로 마음먹었어서 지난 4월 말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원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덕분에(?) 요즘 창작의 고통을 물씬 느끼고 있다. 기획 과정은 즐거웠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좋았고, 그것이 이 사회에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설레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막상 쓰기 시작하면 쓰다가 지우길 반복해서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막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다. 심지어 목차도 미리 써놨는데 그대로 쓴 적이 거의 없고, 실제로는 목차에 없는 새로운 글을 써내는 것에 가까웠다.


쓰려고 했던 말과 막상 쓰는 말이 달라지니 이게 맞는 건가 의아했다. 꼭 써야겠다 싶은 것들은 어느 정도 독자의 니즈를 고려한 글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은 작가의 당시 감정과 심리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데, 최근 들어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나머지 글도 전체적으로 우중충해졌다. 막 시작했을 때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책과 지금 내가 마주하는 원고 상태를 보니.. 절대로 내가 그리던 책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심한 채로 산책을 다녀온 후 맥주를 들이켜며 유퀴즈를 보는데, 김영하 작가님이 마치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이런 말을 했다.


사진 : 유퀴즈 온 더 블럭, tvN


“꼭 써야지 하는 걸 쓰려고 하면 리스트가 제한돼요. 그래서 저는 절대 최선을 다하지 않아요. 안 쓴다 생각하고 막 써보는 거예요.”


아뿔싸, 나는 최선을 다해버렸다; 글 하나에 꼬박 5일을 들였다. 쓰다가 지우고 퇴고하고 수정하길 수십 번 반복하다 보니, 새 글을 쓰기도 전에 그 과정이 떠올라 부담감이 엄습한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했던 이유는, 올해 책을 내야 한다는 결의와 완성도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다소 치명적인 실수도 했다. 글쓰기를 검색하고 다닌 것이다. 브런치북 수상 경력이 있는 작가가 쓴 에세이 쓰는 법을 읽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글에 반영하려다가 자칫하면 내 고유한 색을 해칠 뻔했다. 너무 열심히 찾아다니며 글쓰기를 배우다 보니 정작 내가 쓰고 싶은 글에 대한 고민은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최근에 ‘30분 막 쓰기’를 작업 시간에 추가했다. 본격적으로 글 한 편을 쓰기 이전에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를 대충 30분 동안 막 써보는 것이다. 넘버링으로 순서를 매기면서 의식의 흐름대로 써보니 효과가 꽤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쭉 열거해보니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전체적으로 윤곽이 보였다. 그걸 바탕으로 서론과 결론을 연결 지었더니 제법 그럴싸한 글이 되었다. 물론 이 글도 수십 번의 퇴고를 거쳐야 하겠지만, 글을 처음 쓸 때 들었던 막연함이 꽤 줄었다.


어떤 날은 불현듯 한 문장이 떠오를 때가 있다. “혼자만 잘 사는 건 재미없어"라던지(애독하고 있는 뉴스레터의 태그라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떠올린 한 문장 “영감은 영감을 찾지 않을 때 나타난다"라던지. 많은 말들을 함축하는 단 하나의 문장이 머릿속에 라이터를 켜듯이 나타날 때가 있다. 그렇다, 영감은 영감을 찾지 않을 때 나타난다. 내가 맥주를 마시다 김영하 작가의 말을 발견한 것처럼, 귀하디 귀한 영감은 내가 찾으려고 할 때는 잘 보이지 않다가 샤워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등 일상적인 순간에 불현듯 찾아온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매일 엄격하게 루틴을 지키며 살아가는지 알 것도 같다.


글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질보다 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됐건 많이 쓰다 보면 무엇 하나라도 건지기 쉬워지는데, 품질에 신경 쓰다가 쓸 수 있는 글마저 못 쓰게 되면 얼마나 시간 낭비인가. 양에 집중하려면 최선을 다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내가 머물고 있는 일상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겠다. 영감은 수시로 우리를 스쳐 지나가니까.


*이 글은 나의 60%를 들여 30분 정도 휘리릭 써낸 글이다. 잘 쓰진 않았지만 뭐라도 기록했다는 것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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