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정 Nov 20. 2019

나, 개인주의자의 인간관계

남들 보기 이상할까?


남들 보기 이상할까?

극 개인주의자인 나에게 인간관계는 늘 어려운 과제였다. 물론 저마다의 이유로 인간관계는 어렵고 나와 다른 가치관과 성격을 가진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내가 인간관계의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는 것에 비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인간상의 괴리가 큰 것이 고민거리였다. 디자인 분야의 일을 하다 보니 늘 여자가 많은 환경에서 '너는 너, 나는 나'와 같은 태도를 보일 때 서운해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식하느라 늘 나로 있지 못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친구는 있어야 된다는 고정관념에 친구들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뭔가 마음이 허한 것을 느꼈다.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그래야 정상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동기였기 때문이다. 남들 보기 이상하다는 것이 항상 두려웠다.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남들과 달리 행동할 경우 쏟아질지 모르는 '이상한 사람 보는 시선'이 나는 항상 두려웠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노는 것에 귀재였고 그림 그리고 만들고 책을 보는 등 혼자 하는 활동을 선호했다. 물론 나는 이런 성격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은 공부하는 것이 싫다고 했지만 나는 공부하는 것도 싫지 않았고 심지어 시험기간은 좋아하기도 했다. 그 시간은 오롯이 공부에 집중하고 시험만 보면 되었고 집에도 빨리 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특히 부모님께서 '외향적이고 자기주장을 잘하며 사교적인 성격'을 좋은 성격이라 말하고 친구가 많아야 좋은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말을 안 하고 있으면 말을 해야 한다고 지적을 했다. 이후 단체생활을 하면서 말이 없는 성격으로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고 내 원래 성격을 들키지 않으려는 태도가 배었다. 밖에서 '너는 참 말이 없구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지적이나 나무라는 말처럼 들렸다. 실제로 그 상대가 그런 의도로 하지 않았어도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다. 부모님의 반응이 내면화되어 나 스스로를 그렇게 보았으니까.


하지만 연기를 하면서 산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나는 점점 연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밝은 성격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했고 내 성격과 맞는 일과 일하는 방식을 찾으려고 했다. 나는 일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고 잡담이나 자잘한 대화로 그 흐름이 끊기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렇게 일만 하면 힘들다고 사람들하고 얘기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서 풀어야 한다는 조언을 종종 들었다. 나는 사실 1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책 보고 사색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외로움도 크게 느끼지 못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내가 큰 불편을 못 느끼는데 왜 남을 의식해서 억지로 어울리려고 해야 할까? 아무도 이에 대해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다면 이게 내 인생에 이렇게 큰 숙제거리였을까? 이제는 생각의 관점을 바꾸려고 한다. 남들의 이상하다는 시선을 의식해온 것도 내 선택이었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도 나의 몫이라고. 그냥 나로 살겠다고.



몇 달 동안 카톡 휴지기


올 초부터 몇 달 동안 카톡을 탈퇴했다. 나는 단톡 방에서 나누는 시시콜콜한 잡담과 일일이 반응을 해주는 것들이 피곤했고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연락과 부탁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다 대응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처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가까운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목록에서 삭제를 하기 시작했다. 라이트 하게 줄어든 카톡 목록을 보니 정말 시원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자 했기에 용기를 내어 카톡 탈퇴 버튼을 눌렀다. 누르기까지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갑자기 나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더 이상 카톡에 피동적으로 묶여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더라도 내 의지로 시작해야지. 탈퇴를 하고 나니 말로 하기 어려운 해방감을 느꼈다. 스마트폰을 구입한 지 어언 7년, 7년 동안 포함되어 있던 카톡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에서 나오니 참 묘한 느낌이었다. 가상공간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어떤 공동체 공간같이 느껴졌었다. 언제든 날 찾으면 나는 뭐라도 반응을 해줘야 하는 그런 항시 대기 단체생활 같은 느낌. 



탈퇴 페이지는 늘 숨어있다지. <더보기 - 설정 - 개인/보안 - 개인정보 관리 - 카카오톡 탈퇴>에 있다. 한 번쯤은 과감히 가족과 친구가 뭐라든 회사 상사가 뭐라든 탈퇴를 감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가상공간을 탈퇴하고 보내는 하루하루는 아무렇지도 않고 참 평화로웠다. 그래, 저것이 없어도 내 하루는 별 것 없이 진행되고 밥 먹고 사는 일상은 여전한데 저게 뭐라고 나가기를 두려워했나라는 허망함도 느껴졌다. 그렇게 몇 달을 카톡 없이 지내다가 다시 카톡을 설치했다. 카톡의 장점은 명확하다. 무료라는 점, 그래서 문자보다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점이다. 나는 관계들을 정리하면서 연락처를 바꿨고 새로 가입한 카톡에는 정말 남을 사람만 남은 소박한 목록만이 있었다. 남의 프사를 보거나 대화명에 반응하지 않고 정말로 필요할 때만 들어가서 기능을 이용한다.



관계 디톡스는 필요하다

내가 개인주의자라서가 아니라 한 번쯤은 치이는 많은 관계들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정신건강에 필수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오롯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바라볼 시간이 없이 늘 사람에 둘러싸여 있다면 상당한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내 주변의 익숙한 것들을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남들 시선도 저버리고 관계가 주는 안정도 포기하고 남을 위한 노력도 잠시 내려놓은 채 갖는 오직 나만을 위한 자유의 시간이니 말이다. 어쩌면 혼자 있음을 좋아하는 나는 많은 것을 가진 다른 누구보다도 사치스러운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혼자 있음에 대한 남들의 시선을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즐기는 사치이니 마음껏 즐겨도 되겠지.


다행히 단체주의가 강했던 한국사회도 서로 과도한 간섭을 꺼리는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나 같은 개인주의자나 내성적인 사람, 비혼인들도 설 자리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개인주의자라도 관계는 필요하고 교류는 환영한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간섭, 오지랖, 집착만 없다면 서로 도움을 주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교류만큼 사람에게 영감과 에너지를 주는 건 없다고 생각하니까.


   



작가의 이전글 다시 삶의 이유를 찾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