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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퐈느님 Nov 12. 2016

[Peru] 사막에서 재회한 나의 청춘

신나고 뜨거웠던 와카치나 이야기

여행을 준비하거나 다녀오게 되면 그곳에 대해 다녀오기 전보다 많이 알게 된다.

사실 페루는 회사를 그만두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었지만 여행을 가기 전에는 페루는 안데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잉카 문명의 유적지들이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막연히 있었던 것 같다.

페루에 바다가 있는지, 사막이 있는지 잘 몰랐었다.

(생각해보면 나스카 라인이 페루에 있는 것은 알았는데 왜 사막이 있을 거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와카치나 사막의 모래 언덕에서


사막에서 재회한 나의 20대

고작 갓 30을 넘긴 주제에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간을 떠올려보자면 20대 초반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인생에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많지만 그 순간들이 가장 촘촘하게 이어져있던 기간이 대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려웠던 전공 공부를 도서관에서 밤새 하는 것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인생에 대한 개똥철학을 토론하는 것도, 엄청나게 개성 넘치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도서관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는 것도, 수많은 전시들을 보는 것도,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도, 또래들과 어울려 1박 이상의 여행을 하는 것도, 아르바이트를 통해 그전까지는 만져보지 못했던 큰돈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었을 때도,

그 모든 것이 다 신나고 즐거웠던 20대 초반이었다.

세상엔 즐거움이 가득한 것 같았고,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적이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공부도 재밌었고, (잘 노는 편은 아니었지만) 노는 것도 재밌었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나의 하루에 '즐겁다'보다는 '힘겹다'라는 감정의 비중이 더 커지는 순간이 잦아졌고,

또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힘겹다'라는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많아진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는 사막에 오게 되었다.

아무 기대도 없던 지구 반대편의 사막에서, 나의 20대 초반이 떠올랐다.


페루의 사막, 와카치나에서의 버기 투어

사막에서 버기카를 타는 것은 여행 다큐 프로그램의 단골 장면 중 하나다. 특히 와카치나 사막에서의 버기카 투어는 '꽃보다 청춘' 페루 편의 그들이 엄청나게 신나 하는 모습을 접하게 된 이후 더더욱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에 와카치나에 도착해 숙소를 구하기가 무섭게 배낭을 내려놓고 바로 투어를 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오프로드를 달려봤는데 그런 느낌일까? 과장 좀 해서 내 키만한 바퀴를 가진 차도 타봤는데 하는 마음이 컸는데, 이게 웬걸. 생각보다 버기카는 아담했다. 

작은 마을 와카치나
호객행위를 하던 청년이 버기카 운전자에게 무언갈 설명해주고 있다. '얘네 아시아에서 온 호구야' 이런 말은 아니었길.

흥정에 흥정을 해 깎고 깎은 투어라 그런지 다른 버기카보다도 작은 느낌이었다. 왠지 크면 더 신날 것 같았는데.. 게다가 버기카를 운전하는 드라이버는 지친 하루를 보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동을 걸고 달리는데 옆 투어의 버기카와 엔진 소리가 작은 것 같았다. 기대감이 꺾이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도 잠시, 사막에 들어가고 속도를 조금 내며 달리니 내가 사막 모래 위를 달린다는 기분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내가 사막의 모래 위를 달릴 줄이야.

달리는 버기카에서 찍은 사진

그런 상념에 젖어 꺾인 기대감이 살짝 올라오는 순간, 우리의 버기카 드라이버가 화려한 핸들링 솜씨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아!!!!!!!!!!!!!!!!!! 이런 재미구나!

꿀잼이다. 꽃청춘의 그들이 왜 그렇게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즐거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 또한 그렇게 낄낄대며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동영상으로 보면 내가 느꼈던 기분이 전달될까. 사막을 달리는 버기카 맨 앞자리에서 찍은 동영상

스피드를 즐기고 나면 그다음은 샌드 보딩이 기다리고 있다.

눈에서 타는 스키/보드 다 무서워하는 나에게 샌드 보딩이라. 처음 스키를 배웠을 때, 이건 내가 즐길 스포츠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주변의 권유에 따라 보드를 탔을 때 나는 동계스포츠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근데 사막에 와서도 보드를 타라고? 기대하는 척했지만 사실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보드에 엎어져서 쭉 미끄러져 내려오는 순간, 깨달았다.

샌드 보딩은 맞지만, 어릴 적 눈썰매 탈 때의 그 느낌이랄까. 폭신한 눈썰매! 

보드 타는 법을 설명해주던 우리의 버기카 드라이버. 
와카치나의 오아시스. 사막의 오아시스가 바로 눈 앞에 있었다.

해지는 사막에서 신나는 오후를 보내고 내려오니 여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신고 있던 옷, 특히 신발에서는 평생 와카치나 사막의 모래가 나올 것 같았다. 털어도 털어도 계속 나오는 모래.. (정말 여행이 끝날 때까지 사막의 모래가 나왔고, 결국 그 신발은 인천공항에 들어오자마자 버렸다.)

결국 옷을 입고 숙소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밤의 사막은 쌀쌀했고 호스텔의 야외수영장에 들어가긴 추웠지만 사막에서의 즐거움이 아쉬웠는지 다들 물에 뛰어들었다.

신나는 기분을 표현해주던 사진 한장. (물론 버기카엔 우리말고 다국적 여행객이 있었지만 꼭 전세낸 것 같이 사진 찍었네)

수영복을 갈라파고스에 버리고 왔던 나도 수영하고 나서 무슨 옷 입지? 이 옷은 어떻게 빨지? 와 같은 복잡한 생각은 날려버렸다. 뒷일에 대한 고민 없이 수영장에 일단 뛰어들었다. 그렇게 야밤의 수영과 페루산 와인 한 병, 사막 밤하늘의 별들은 와카치나에서 나의 20대를 떠올리기에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와카치나 숙소가 여행 중 묵었던 숙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안 좋았는데도 말이다)

와카치나에서 찍은 밤하늘. 렌즈에 먼지 묻은거아니다. 똑딱이 카메라로 찍어도 별이 저렇게나 잘 찍힌다.


강렬하게 뜨거운 한낮의 사막

전날 사막에서의 즐거운 시간의 여운 덕인지 아침과 점심 사이, 다시 사막의 모래언덕을 찾았다.

사막의 오아시스

한낮의 사막은 정말 뜨거웠다. 

신고 있던 쪼리의 발가락 사이사이 끓는 물이 들어오는 것 같은 뜨거움. 진짜 잠시라도 신발 없이 모래바닥을 디디는 것은 괴로울 정도였다.

뜨거워서 발바닥을 모래에 대고 있기가 힘들다. 그래도 좋다고 낄낄

사막이라는 것이 이렇게 강렬했나. 사막 언덕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며 느꼈다. 왜 아무도 낮에 버기 투어를 하지 않는지.

그 모래를 생각하면 아직도 내 발바닥이, 발등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아직도 신촌, 대학로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곳에서 때론 깔깔대며 때론 술 취해 비틀거리던 나의 20대가 생각나듯이.


생각보다는 실망스러웠던 미스테리한 나스카 라인

페루의 사막,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나스카 지역이 미스테리한 문양들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페루에 사막이 있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스카 라인은 10살 이전부터 알았으니까.

한참을 달려 본 나스카 라인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운동장에 분필가루로 그려놓은 그림' 같다고나 할까.

사막에 그런 큰 그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신비로울 수 있지만, 너무나 예상했던 그 모습에 실망했었던 것 같다.

클릭하고 확대해서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나스카라인 직찍.

비행기에서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얼마나 신기했을까. 또 그 그림이 긴 시간이 지나도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낸 사람도 얼마나 신비로웠을까.

안타깝게도 둘 다 아닌 나에게 나스카는, 아스팔트 위에 사막을 느낄 수 있는 장소에의 만족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가기 전의 기대감보다 다녀오고 난 후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 그래서 어쩌면 나스카 라인은 다녀오기 전, 그냥 막연히 가고 싶었던 장소로 남겨두는 것이 더 아련했던 것 같다. 

근데, 나스카 라인은 누가 그린 걸까. 글을 쓰는 지금도 막연히 학자들이 내세운 가설 너머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해본다.

사막이 주는 이국적인 풍경이 더 멋있었던 것 같다. 나스카라인 전망대의 반대쪽은 도로다. 어쩐지 나스카라인보다 더 멋있는 것 같다.
여기가 바로 나스카라인입니다. 표지판에서 사진찍다 전망대 앞 좌판 상인들에게 한소리들었다. (스페인어로) 왜 못찍게 했는지 아직도 미스테리.


사실 사막은 처음 갔을 때는 신비로웠지만 이내 다시 도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정도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불편함을 주는 장소였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시끌시끌한 뉴스들과 바삐 사는 사람들 속에 언제 사막에 다녀왔냐는 듯 어우러져 지내다 보면 정말 가끔씩 숨이 컥컥 막힐 때가 있다.

사막에 앉아있던 나

그럴 때면 어쩐지 아무것도 없던 사막에 다시 돌아가 혼자 앉아있고 싶어 진다. 어쩌면 신나고 즐겁기만 했던 20대 때는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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