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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May 23. 2022

예쁜 쓰레기를 또 사버렸다


일이 바빠 거의 1년 만에 머리를 했다.

긴 머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룸메이트가 찍어준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다듬어야 했다. 아니, 펌을 해야 하나. 하여튼 뭐라도 해야 했다. 단정함을 찾아야 했다. 모든 사진이 안 예뻐 보였다.


즉흥적으로 바로 다음날로 미용실을 예약했다. 다행히 하루 전날에 예약이 가능할 정도로 예약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곳이었다.

9년 간의 다양한 실험 끝에 나에게 제일 잘 맞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스타일은 레이어드 된 C컬이라는 결론을 얻었기에 이번 미용실 결제가 실패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 새 신발을 개시했다.


머리를 하고 나오면 꽤 만족스러울 것이었고 기분 좋은 날에 새 신발까지 가미되면 나이스 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화장도 하고 머리도 하고 새 신까지 신었는데 바로 귀가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끝나면 신촌의 유명한 파이집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메로나 색 에나멜 플랫폼 샌들.

한국 코스에서는 계속 품절이다가 한참이 지나 겨우 재고가 들어왔을 때, 동시에 시즌오프 세일이 맞물려 부리나케 결제한, 정가 22만 5천 원짜리 금 샌들.

메로나는 오늘의 완전한 실패였다.


집에서 미용실이 있는 신촌까지 가려면 일단 가로수길을 따라 신사중학교 정류장까지 나가야 했는데, 그 12분 남짓의 직선 도보를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단단한 에나멜가죽은 미끄러져 내려오는 발등을 반복해서 쓸었고 발목을 엑스자로 휘감는 스트랩은 수시로 피부를 할퀴었다.

내가 또. 또 예쁜 쓰레기를 샀군.

비싸서 버리지도 못할 거를.

250 사이즈는 중고로도 잘 안 팔리는데.


걸을수록 화가 났다.  

망할 새 신발보다도 신발을 만든 사람들의 무책임함에 화가 났다. 한 걸음마다 고통으로 짜릿했다. 도대체 어떤 모양이면 이런 통증이 있나 싶어 발등을 내려다봤다. 빨갛게 살이 파여있었다. 이미 물집이 한번 터진듯했다. 놀랍지 않았다. 더한 몰골이었어도 납득했을만한 고통이었다. 형편없는 블로퍼를 샀을 때도 하루 기분을 망칠 정도로 발등이 아팠지만, 이것보단 나았다. 그건 발뒤꿈치라도 뚫려 있었으니 정말 못 견딜 순간에 한 번씩 뒤로 후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스트랩 샌들은 달랐다. 사면초가였다. 살결을 긁어내려고 달려드는 딱딱한 가죽에 앞뒤로  포위당한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신발이지 않은가.

신고 걷는 게 주 목적인 신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신발을, 22만 5천 원은 받아야 만족스러운 비싼 소재를 사용해서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집 밖에 나왔는데 집에 돌아갈 길이 걱정됐다. 돌아가는 길에 한 번은 이를 악물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샤워 물줄기에 닿는 벗겨진 흰 살들이 따가워 움찔하겠지. 파이집에서 최소 두 조각은 먹어야 집에 돌아갈 용기가 날 듯했다.


지하철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의 신발을 주르륵 훑어봤다. 맞은편 14개의 발들이 모두 부러웠다. 예쁜 신발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저 폭닥한 양말에 신축성 좋은 운동화가 간절했다. 이 예쁜 쓰레기를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 이 신발을 언제 또 신을지 전혀 모르겠다. 출근길에 신고 나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걸 신고 출근했다면 난 오후 반차를 썼을게 분명하다. 발의 통증만 생각하면 국토대장정을 마친 기분이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한동안은 운동화만 신어야겠다.


머리는 예상대로 마음에 쏙 들었다.

세 번의 샴푸와 두 번의 드라이를 하러 오가는 와중에도 발이 비명을 질렀지만, 결과물은 역시나 만족스러웠다. 마지막 샴푸에서 두피 마사지를 받으면서 발의 피로까지 한 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진정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건 마사지였다.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기분을 노곤 노곤하게 해주는 마사지. 열심히 번 돈을 이딴 예쁜 쓰레기에 쓸 것이 아니라, 마사지샵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데자뷰를 느꼈다. 작년에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서 나가면 월급을 쇼핑 같은데 쓸 게 아니라 마사지샵을 예약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샴푸가 끝나고 감은 눈을 뜨는 순간, 이번에도 나는 마사지를 빠르게 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다시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겠지. 다음 펌을 할 때까지 이 쾌감을 잊어버리고 지낼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군.


클리닉을 얼마나 정성스레 해준 건지 검은 물결처럼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어찌나 찰랑거리는지 글을 쓰는 와중에도 앞머리가 자꾸만 흘러내려 눈앞을 가린다. 앞머리 웨이브를 세련되게 손질해 주신 건 알지만 결국 시원하게 귀 뒤로 꽂고 말았다.

신발도 머리도 일단은 편한 게 최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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