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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고래 Jul 29. 2023

귀한 여름 손님이 된 기분으로

한국의 집 고호재 여름 다과상 후기

 내 돈과 시간을 들이고 서울까지 가는 발품을 팔며 손님 대접받으러 가는 상황이 모순적으로 보일지라도 아무렴 어떠랴. 아직까지도 이 여름 다과상 티켓팅 전쟁(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에서 두 자리를 거머쥔 그 영광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인데 오늘의 체험은 좋은 기억으로만 가득했다. 기억 속 오감이 모두 휘발되어 사라지기 전에 남은 기억이라도 그러안고자 한다.



 여름 다과상의 모든 병과와 찰떡같은 조화를 이뤄낸 일등공신 오미자차송화 참외 팥빙수이다.


 송화 참외 팥빙수는 얼음 없이 참외, 삶은 팥, 살포시 얹은 송화가루로만 이루어진 빙수이다. 이제까지 빙수는 그릇 바깥까지 넘치도록 토핑을 얹어 모래성 무너뜨리지 않기 경기에 참전한 아이들처럼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만 알았다. 게다가 얼음 대신 참외만으로 만들어진 빙수라는 설명까지 들어서 호기심을 가장 많이 유발한 메뉴였는데, 호기심 충족을 넘어 만족감을 선사한 음식이었다.

 알고 보니 살짝 데친 참외를 얼린 후 갈아서 얼음 대용으로 빙수에 넣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얼음 같은 참외 덩어리만 입에 물고 있어도 달짝지근한 맛이 퍼졌다. 참외 위에 올라간 팥은 일반 빙수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설탕범벅으로 조린 팥처럼 달고 찐득찐득한 맛이 아니라 살짝 퍼석한 식감에 고소한 맛이 났다. 단맛이 수줍음처럼 서서히 입안을 시원하게 물들이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오미자차는 여름 다과상의 다양한 구성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메뉴이다. 엄마와 나로 하여금 이 오미자차를 마시기 전으로는 입맛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한탄을 자아내게 했는데, 새초롬하게 투명한 붉은빛은 물론이고 이제껏 설탕에 가려져왔던 오미자의 한을 제대로 풀어주는 음료였다. 깊이 있는 새콤한 맛이 단조로울 수 있는 단 맛의 진행 속에 변주를 줌으로써 여름 다과상의 조화로움을 돋보이게 했다.

제일 좋았던 최애 메뉴니까 한 컷 더!



 화병 장식인양 제 본모습을 감춘 음식은 오미자배정과이다. 우리 엄마의 애정을 가장 많이 받은 메뉴였는데, "10개는 먹어야 기별이 갈 것이며, 그 10개도 한 입에 다 털어 넣고 싶다."라고 평하셨다. 처음에는 오미자에 물들인 배를 말려 꿰었다길래 쫀드기 같은 식감이려나 했다. 그 정도로 쫀득한 식감은 아니지만, 오미자의 톡 쏘는 새콤함과 그에 가려지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낸 배의 단 맛이 잘 어우러진 독특한 한과였다.

 오미자배정과 왼편의 샛노란 젤리처럼 보이는 음식은 살구과편이다. 묵처럼 탱글탱글하게 보이지만 식감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입 안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며, 조금씩 베어 물어도 달달하고 새그무레한 살구의 맛이 진하게 퍼진다. 살구를 제대로 맛본 적이 없었는데 한번 맛보고 나니 왜 여름 다과상에 활용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살구과편 아래 알록달록 귀여운 자태를 뽐내는 음식은 원소병이다. 은은한 찹쌀경단의 빛깔처럼, 경단을 적시고 있는 유자와 꿀이 들어간 과즙도 은은한 맛을 낸다. 이전에 원소병의 사진과 설명을 본 적은 있으나 맛을 본 적은 없어서 과즙이 물엿처럼 찐득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과즙의 점도는 묽은 편이며 오히려 그래서 찹쌀경단과 잘 어우러지는구나 싶었다. 경단과 과즙이 같은 식감이면 조금 질리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종류의 음식이 한 접시에 담겨있는데 이는 단호박증편, 산딸기정과, 콩 다식, 송화다식이다. 단호박증편 술빵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고 설명해 주셨지만, 이 음식은 시장에서 파는 카스테라 식감의 술빵이 아니라 빵의 탈을 쓰고 있는 떡이었다. 찰진 식감을 좋아하는 내게는 하나만 있어서 아쉬운 메뉴였다. 아마 나가는 길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실현할 수 있을 만큼 큰 단호박증편이 있었대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샀을 것이다. 산딸기정과는 알알이 산딸기 알갱이와 설탕가루가 같이 씹히는 새콤달콤한 음식이었다. 다식(콩 다식, 송화 다식)도 이번 기회에 처음 먹어보았는데 가장 달지 않게 생긴 애들이 제일 달아서 (특히 콩 다식!) 기분이 오묘했다. 다식은 푸석푸석하고 텁텁한 한과일 것 같다는 막연한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먹어보니 꼬숩고 단 맛이 매력적이어서 녹차와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담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마주하며 정성 들인 다과상을 받으니 여름휴가가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곳에서 좋은 경치 보고 맛있는 거야 말로 궁극의 휴가 아닌가. 여름 다과상이 만족스러웠던 가장 큰 이유는 모든 다과에서 재료 본연의 자연스러운 맛을 살리면서 그 희미한 맛을 극대화하고 풍부하게 하려고 정성을 다 한 노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리치도 하루아침에 요리 고수로 만들어주는 비법이 곳곳에 난무하는 요즘 천천히 가더라도 올곧은 길을 가려고 하는 마음이 음식에 담기기란 쉽지 않다. 비단 음식뿐인가. 그래서 더 귀한 상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 계절에도 귀한 손님으로 머무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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