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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고래 Jul 28. 2023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완벽한가 -2

유명 웹툰작가의 특수교사 아동학대 고발사건에 관하여

 위의 글과 이어지는 글이다. 이 사건의 개인적 의견을 이전 글에 서론으로 길게 풀어놓았기에 여기서는 거두절미하고 이어지는 본론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3.  배려받기만 원하는 "일부" 장애 학생 학부모에게 고하노니..

 부모이면서 왜 아이를 배려하는 인간으로 성장시킬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편협한 잣대로 장애인은 배려할 수 없다고 자녀의 능력에 한계를 그어버리고 사회가 배려해 주기만을 원하는지. 이런 생각을 가진 학부모를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장애인 차별 아닌가?


 장애인도 배려할 수 있다. 학기 초에 어른 물건 한 손으로 받고, 간식을 받아도 감사 인사 한 번 안 하고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줄 때마다 계속 교정하고 반복 훈련시키면 금방 익숙해져 곧잘 한다. 나는 배려를 가르치기 위해 평소 학생들이 공예품이나 간식 등을 만들면 꼭 교내 선생님들께 선물하도록 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행동했을 때 기쁨을 배우도록 한다. 길고 지난할지라도 반복해서 교육하면 학생들은 분명 성장하는 지점이 있다. 따라서 부모는 가정과 학교에서의 일관되고 반복적인 교육과 연습으로, 아이는 올바른 품성을 지닌 인간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믿으며 노력해야 한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우리 애는 배려는 할 수 없지만 배려는 당연히 받아야지'라고 생각할게 아니고.


 그리고 자기 의무는 다 하지 않은 채 배려를 과도하고 당연하게 요구하는 지점에서 역차별은 시작된다. 나는 배려가 역차별로 넘어가는 이 미묘한 스펙트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일반학교 학생과 교직원이 긍정적인 통합을 경험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결정된다고 본다. 그리고 일반 학생들이 학령기 때 긍정적인 통합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의 경험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이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처럼 타인이 명백하게 피해를 보는 상황에서도 아이의 장애를 무기 삼아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무리한 배려(성추행으로 인한 피해학생의 정신적 고통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피해아동과 계속 같은 교실에서 수업받기를 요구하는 일) 주장하면 그것은 오히려 역차별이다. 교실에서 역차별을 경험한 일반 학생들의 머릿속에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뿌리 깊게 박힌다. 이런 아이들이 성장하면 장애인에게 포용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겠는가, 배타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겠는가? 내 자식 위한다고 하는 일이 결국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히려 훈육으로 아이가 점차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일반 학생들이 같이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애 학생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예 못하는 애, 아예 안 되는 애'가 아니라 '시간이 걸려도 바뀔 수 있는 애,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애'. 또래 아이들이 자녀를 이렇게 봐주기를 원하지 않는가?


사회는 모두 다 함께 노력해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4. 녹음기 사용: 꼭 그렇게 다 원하는대로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

 다른 작품도 아니고 '신과 함께' 작가의 발상이라는 점에서 어마어마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앞으로 그 작품을 이 사건 이전의 감정을 담아 감상하진 못할 것 같다. 자녀의 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넣어 보내는 행위는 정정당당하지 못했다. 차라리 학교 생활 참관을 요구했어야 했다. (내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힌다)


 만약 나에게 부모가 솔직하게 ~한 점이 궁금하여 혹은 의심이 되어 선생님의 평소 지도 모습과 자녀가 학교에서 또래와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만) 참관을 허락했을 것 같다. 몰래 녹취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인간 대 인간으로 그 편이 차라리 솔직해서 훨씬 낫다. '자녀에게 학교 생활을 온전히 전달받을 수 없으니 답답해서 그러시구나'라고 이해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등교해서부터 하교할 때까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포함한 자녀의 학교생활을 1주일만이라도 곁에서 지켜보면 아무리 부모라도 특수교사를 함부로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작가는 '녹음에는 단순 훈육이라 보기 힘든 상황이 담겨있었고'라고 입장문에 특수교사의 훈육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녹음 음성을 직접 듣지 않았기에 성급하게 단언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차피 각자 괜찮다고 느끼는 훈육의 허용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녹음이 공개되어도 논란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자녀의 특성을 고려해서 생각했더라면 현재 밝힌 입장과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수 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녀에 대해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인 발달장애 아동 특성상 정확한 의사소통이 불가하였고'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이 학생에게 일반 초등학생에게 하듯 차분히 조곤조곤 길게 설명하는 훈육은 어쩌면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아이 수준에서는 어려운 단어를 말로 듣기만 하면 지도 내용에 아이가 집중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맥락 파악도 분명 어려울 텐데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자신이 진짜 잘못했음을 느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비언어적 요소가 필요한 부분이다. 단호하게 봐주지 않겠다는 표정. 딱딱 끊어지는 엄격한 어조와 말투. 일반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운 중증장애 학생에게는 비언어적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단순하고 명료하게 훈육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이유까지는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하면 안 되는 행동인가 보다라는 것을 분위기로나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제 '정도의 차이'라는 논점이 등장하겠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단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적절한 정도의 비언어적 요소마저 아동학대로 치부해 버리면 아동의 특성을 고려한 효과적인 훈육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수교육과 특수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이해도 부족이 나타나는 또 다른 지점이 있는데 바로 여기다. '본인의 수업 시간 중에 발생한 일이 아님에도 우리 아이에게 매우 적절치 않은 언행을 하였으며 이는 명백히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몰이해, 특수학급 교사는 자녀의 또 다른 담임교사이다. 담임교사에게는 수업 이외의 생활지도도 중요한 업무이고, 이는 특수학급 담임교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두 번째 몰이해, 특수학급 담임교사는 일반학교 유일의 특수교육 전문가이다. 따라서 통합학급 수업 시간에도 통합학급 교사가 본인의 전문성만으로는 아이를 이해하고 훈육하기 어려울 때 특수교사의 도움을 얻고자 하며, 특수교사는 통합학급 교사와 협력하여 학생이 통합학급에 잘 적응하도록 지도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란 이런 것인가.


 이 대목을 보고 작가님은 이제껏 특수교사를 자녀의 샌드백 정도로만 여겼구나 싶었다. 샌드백처럼 입 닫고 자신들과 자녀의 모든 행동을 그저 받아주고 흡수해야 하는데 감히 입을 열고 듣기 싫은 소리를 남발하니 아니꼬왔을 거다. 똑똑히 알아두길 바란다. 특수교사는 장애 학생과 학부모가 주는 충격을 다 흡수하고 속으로 삼켜내야 하는 샌드백이 아니다. 우리도 사람이다.


 그리고 대화의 당사자인 학생 본인과 교사의 허락 없이 녹음한 것은 불법 녹취 아닌가? 정확한 의사소통이 불가한 발달장애 초등학생이 자신과 특수학급 선생님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을 타인의 개입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만으로 허락했을까? 이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아이에게 각서를 받고 지장이라도 찍어 남겨두셨는지?


5. 올바른 훈육은 결국 학부모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특수학교도 부족한 나라에서 성인 장애인이 공교육만큼 전문성을 갖춘 인력에 의해 인격적으로 대우받고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능동적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시설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이건 명백하게 우리 사회가 개선해 나가야 할 지점이다.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취향에 따라 주도적으로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하며, 그게 어려운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는게 공공복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당장은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면 학교가 부모와 책임을 분담해주는 시기가 지나고, 오롯이 성인 장애인 자녀를 부모 홀로 감당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어렸을 때 제대로 훈육하지 않으면 부모는 이 시기를 버텨내기 힘들다. 성인이 돼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그제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훈육의 필요성을 느껴서 그 때 시작하면 늦다. 이미 오랜 세월 형성된 버릇과 학습된 상황이 있기에 어른을 훈육으로 변화시키기가 정말 어렵다. 그래서 특수교사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조기중재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 올바른 훈육으로 단체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학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그나마 넓은데, 폭력성과 성 사안 발생 위험이 높은 학생은 받아주는 곳이 거의 없다. 훈육은 자녀와 부모의 평생을 좌우한다.



 긴 글에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토해내는 바람에 마무리 할 말이 남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직접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장애 학생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며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고. 우리끼리 싸우다 정말로 투쟁해야 할 대상을 겨냥하지 못한 채 쓰러져서야 되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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