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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수다쟁이 May 09. 2020

어느 세신사의 위로

타인의 고통을 알아봐 준다는 것<feat. 아픔이 길이 되려면>

며칠 전 엄마를 따라 목욕탕에 갔다. 엄마는 세신사에게 때를 밀라고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맨살을 남에게 맡기는 게 부끄러워 거절했으나, 엄마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때를 밀었다. 때를 밀어주던 세신사는 나에게 초콜릿 우유를 주며 몇 학년인지 물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렇게 때를 밀면서 세신사와 좀 친해질 수 있었다. 그분은 엄마 또래의 중년 여성으로 나와 동갑인 장성한 아들이 있는 평범한 어머니였다. 세신이 끝나갈 무렵, '너무 힘들었겠다.'라는 한마디가 묵직하게 들려왔다.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한 말씀이었다. 엎드려 있는 나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고 아파 보인 듯싶었다.


작년부터 한 1년 정도 어깨와 등 통증이 심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하거나 취준을 했기에 상체의 밸런스가 무너졌다. 아주머니는 공짜 마사지라며 경락을 해주셨는데, 승모근부터 목, 어깨, 등, 꼬리뼈까지 정성스럽게 마사지를 해주셨다. 너무 아팠지만 한 편으로 묵은 통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어른이 되는 건 쉬운데, 늙어가는 건 어려워

    

너무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 나에게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나이를 먹어 금세 어른이 되지만, 늙어가는 건 고통이 수반된다. 내 나이를 듣고 점점 몸이 고장 날 일만 남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원래 처음 보는 사람하고는 별말을 잘 안 하는 편인데, 나도 모르게 맞는 말 같다며 어느새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나의 몸에 1-2년 사이에 스트레스와 고단함이 쌓여 통증이 만들어졌고 고통의 흔적이 남게 된 것이다. 자신보다 30년은 젊은 사람에게 그런 위로의 말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씀 한 마디마다 진심이 느껴졌다. 세신을 해주면서 연신 땀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내던 모습이 떠오른다.


스스로도 무뎌진 채 살아가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 고통을 알아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됐다. '열심히 살고 있는 거처럼 보인다'는 한 마디에 내가 헛되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몸에 남은 고통의 흔적을 알아봐 주는 것만으로 울컥했다.


내 몸에 남겨진 고통의 흔적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책이 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527802

김승섭 교수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 책을 통해, 고통은 사람의 몸에 새겨져 흔적이 된다고 말한다. 데이터를 근거해서 질병의 원인을 사회적 원인에서 찾고, 부조리한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는 사회역학을 연구한다. 그는 사회 약자들과 소외계층들이 사회에서 받은 부조리함으로 인해 개인이 건강을 침해받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준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자살률, 뇌출혈, 심장마비가 다른 집단보다 높게 나타났고, 실업률이 높아질수록 자살률은 높아진다. 남녀 차별을 받는 것을 얘기하지 못하는 여성은 심지어 차별을 얘기하는 여성보다 더 많이 아프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흡연으로 푸는 비율이 더 높으며, 이들은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환자를 장시간 돌봐야 하는 전공의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우울증의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나고 의료과실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는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성소수자들은 사회에서의 부정적 인식과 편견, 차별로 마음과 몸을 다친다. 모두가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고통을 몸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이 고통의 책임이 개인에게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덧붙여서, 며칠 전 이태원 클럽에 갔던 코로나 19 확진자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서로가 조심해야 하는 엄중한 시기에 마스크를 두르지 않은 채 클럽에 간 것은 백번 잘 못한 일이다. 관련 지차체에서 구상권을 청구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서울 도심에 영업활동을 한 클럽과 안일한 생각으로 클럽에 방문한 사람들의 책임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 클럽이 동성애자들이 방문하는 곳이기에 동성애자들을 조롱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소위 게이클럽에 갔다고 게이들을 싸잡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 확진자가 게이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지 않은가. 또한 자신이 원치 않는 아웃팅까지 당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게이라서가 아니라 게이 '클럽'에 간 것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게이라서' 그들의 성적행위를 조롱하고 있지 않은가.


성소수자이고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나쁜 짓을 안 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성소수자이면서 다른 성소수자 집단을 조롱하는 것 또한 물론 지탄받아야 마땅하며,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입지를 줄이고 또 다른 고통을 몸에 새기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그런 집단이라고 해서 코로나 19와 관련된 일에 비난과 조롱을 동반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평소에 동성애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코로나 19 때문에 성소수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들이 좀 더 정당하게 성소수자를 비난할 빌미를 주는 것은 아닌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심지어 클럽 관련 확진자 중에는 클럽에서 확진된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확진자도 있다. 이미 지역사회에 무증상 감염이 광범위하게 퍼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대의 성소수자 집단에서 이런 일 벌어졌어도 같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물론 있다. 그렇다면 그 상황이 발생되는 것이 잘못된 일이기 때문에 현재, 지금의 상황에서 더욱 원색적인 조롱은 삼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사회에서 찍히는 낙인이라는 고통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몸은 아프다고 한다. 때문에 책의 저자 김승섭 교수는 정부와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부나 공동체가 한쪽의 성소수자 집단만 받아 들 일 수는 없다. 결국은 다 같이 가야 할 문제들이다.


어려운 이야기이다. 나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고 무지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내 생각이 또 다른 비약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함께 그 비를 맞아야 한다.

는 것 또한 직시하고 싶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코로나 19로 인해 또 다른 건강 불평등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바이러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특정 집단에 대한 조롱과 시선으로 인해 아웃팅이 두려워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고통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며칠 전 나보다 고단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세신사 아주머니의 위로처럼 타인의 고통을 알아봐 주는 것이 무엇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 고통을 헤아린다면 적어도 존재 자체에 대한 조롱은 그만할 때이다.


도움이 되는 읽을 자료

http://economychosun.com/client/news/view.php?boardName=C26&t_num=13608750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4/2020040400214.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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