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첫 태양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 답을 알려줄 어른은 본 적이 없다.
비좁은 반지하에선 새해라며 꽃놀이가 한창이었다. 겨울에 뭔 헛소리 같지만 이곳에선 만발이었다. 패 속에 그려진 매화, 벚나무, 난초, 모란, 국화 따위가 계절을 잊은 듯 여기저기서 움텄다. 꽃구경 할 기분은 아니라 토익 기초들을 꺼내 들었다. 아직 이것도 못 끝냈는데 사원증이 목에 걸릴 리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가 놀이에서 패했다. 이제야 끝나나 싶었는데 아버지는 판돈을 더 높이자며 지갑을 열었다. 아침에 떡국도 못 끓였는데 웃음이 피식 나왔다. 친척들은 꿀을 노리는 벌떼였다. 벌침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그만하라는 말을 꺼내기도 뭐 했다.
벌들의 비행이 시작됐다. 담요 위로 패들이 떨어질 때마다 날개의 진동은 강해졌다. 혀끝에서 뱉어진 단어들은 꽃가루처럼 날아갔다. 이래선 꽃이 핀 출근길을 걸을 수가 없잖아. 짠 내 섞인 공기에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기출책보다 조그만 창문을 열었다. 우후죽순 자라난 건물들과 앙상한 나무들이 보였다. 스펙란처럼 깨끗한 눈발이 조금 쌓였을 뿐인데도 풍경은 낯설었다. 그 너머로 까만 산등성이와 이제 막 저물려하는 새해의 첫 해가 보였다. 사물들이 불그스름한 어둠에 묻혀도 태양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익숙해 보였다. 아버지가 가장 강한 족보라며 들이밀었던 패에 있었다. 풍경에서 패를 찾는 나를 보니 저 어둠에 숨고 싶어졌다. 등 뒤에서 아버지의 함성이 들렸다.
아버지 앞에는 담장 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패와 풍경에서 떠올린 패가 놓여있었다. 벌들은 양봉틀에 꿀을 서둘러 뱉고 날아갔다. 이제야 지긋지긋했던 진동이 멈췄다. 아버지는 여태 잃은 것보다 더 늘어난 꿀들을 보며 히죽거렸다. 넘쳐난 꿀을 감당하지 못해 내일은 양봉틀째로 잃을 것 같았다. 벌처럼 잽싸게 지갑을 가로챘다. 내년 봄에는 같이 벚꽃 보러 가요.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살랑거렸다. 그 대답은 읽을 수 없는 패였다. 부디 하얀 태양 아래 산벚나무가 핀 언덕을 고개 빳빳이 들고 오를 수 있었으면 했다. 설의 새 찬 바람이 불어들이었다. 나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아무것도 깨어있지 않은 검은 언덕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