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00유로와 작고 초라한 배낭

by 해오르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의 존재를 알게 된 때는, 2015년 5월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였다. 열차에서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는 한국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 작고 초라한 배낭의 세 배쯤 되어보이는 거대한 배낭에 등산용 스틱까지 짊어지고 몽골 근처의 어느 역에서 승차했다. 그들은 모스크바 이후 여정에서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거라고 했다. 그 당시 나는 그 길이 종교와 관련되었기도 했기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가까이 지난 후, 관심 밖에 있던 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내린 후 한 달 정도 터키와 유럽을 떠돌다가 베를린에서 10 달 정도 정착했었다. 그곳에서 위킹홀리데이비자로 식당 일을 하며 지냈었고, 비자가 끝나갈 무렵에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기 아쉬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충분하지 않은 돈으로 어떤 여행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산티아고 순례길의 경험자들로부터 자세한 후기들을 듣게 되었다.

경험자들이 말하길,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들이 묵는 숙소는 예약없이 가도 항상 침대가 있고 가격도 착하다고 했다. 심지어 무료로 재워주는 곳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무료가 아닌 기부제지만. 그리고 숙소에서 식사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식재료를 다음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돈이 부족한 나에겐 홍해가 열린 것만큼이나 기적적인 이야기였다. 게다가 숙박 예약없이 정처없이 떠도는 자유롭고 한량같은 여행은 너무나 낭만적으로 들렸다. 보통의 여행에서 숙박을 예약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건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낭만은 도박과도 같았다. sns를 통해 보여지는 길 위의 풍경들 또한 입을 다물 수 없이 아름다웠다. 저렴한 가격, 번거로운 숙소 예약의 불필요, 놀랄만큼 아름다운 풍경, 여기에 더해 꿈에 그리던 떠돌이 같은 여행, 이 모든 게 더할 나위없이 완벽해 보였다. 그래서 가기로 했다.

처음엔 신발도 새로사고 침낭도 사고 이것저것준비하고 싶었지만 문제는 돈이 너무 쪼들렸고 가방도 너무 작았다. 이 박 정도의 가벼운 여행에 적당한 크기의 작은 배낭에 두 달 가까운 여행을 위한, 그것도 충분하지도 않은 짐을 쑤셔 넣었더니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좌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돈은 없지만 여행은 포기할 수 없으니. 거지같은 생활일지라도,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도 하지도 않고 나중에 후회할 수는 없다.

일주일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한 달간의 유럽 배낭여행, 그리고 두 달간의 스페인 여행을 함께 했던 작은 가방

돌려받은 방 보증금과 마지막 월급, 그리고 아주 조금 남았던 돈을 모두 합쳐 거의 2000 유로가 전부였다. 베를린에서 마드리드행 항공권과 산티아고에서 서울행 항공권을 예매하는데 600 유로가 날아갔고 수중에는 약 1400 유로가 남았다. 그 돈으로 스페인에서 두 달 동안 살아남아야 한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당장의 생활비는 남겨두어야 했다. 솔직히 여행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이 돈을 다 써버리거나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도 매우 컸다. 여행의 처음은 대체로 돈과의 전쟁이었다. 쓰고싶은 충동과 아껴야하는 의무감 사이에서 죄책감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정말 많은 아쉬움이 남은 여행이었지만 그 당시 나로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험은 언제나 새로운 배움과 추억을 남긴다. 그 때 어리숙하게 겪었던 경험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만큼 성장하지 못 했을 것이다. 이 여행이 끝나고도 수 년 동안 많이 어리석었고, 앞으로도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조금씩 더 배우며 성장해야 하겠지만, 이 여행이 내 인생에 없었다면 여전히 어리석고 부끄러운 아이같은 어른으로 남아있을 지도 모르겠다. 부족하고 어리석었던 나를 성장시켜준 건 결국, 여러 좋은 사람들의 진심어린 관심과 애정이었다. 그 길 위에서 나를 잘 알 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았고 함께 즐거운 시간도 보냈으며 한편으로는 뼈 아픈 외로움도 견뎌야 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이곳에 풀어 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2016년 4월 11일 베를린에서 마드리드행 여객기가 이륙하며 시작되었다.

베를린을 떠날 때의 사진이 없어서 스페인을 떠나면서 찍은 사진으로 대체함


2025년 7월 19일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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