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지는 팜플로나

마드리드에서 팜플로나까지

by 해오르

준비없이 떠난 여행이었던지라 스페인 여행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전까지 한번도 온라인으로 미리 체크인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출발당일 공항으로 가서 체크인 수속을 밟았다. 하지만 당일 항공사직원에게서 체크인을 받을 경우 항공요금보다도 더 비싼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렇게 자금이 부족한 와중에 실수로 수수료까지 지불하고 마드리드행 여객기에 올랐다.

2016년의 베를린의 4월은 아직 겨울의 추위가 남아있었다. 마치 떠나야 할 겨울이 망설이는 것 처럼 따듯해질 것 같다가도 여전히 추웠다. 그래서 떠나는 날 아침엔 털 잠바를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베를린의 공항에 도착하고 따듯한 실내에서 겉옷을 벗은 뒤로는 두번 다시 입을 필요가 없었다. 마드리드 시내에 도착하니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추운 겨울나라에서 봄나라로 건너 옷 것 같았다. 덕분에 무겁게 들고 다니던 그 털잠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베를린에서 노숙자가 많았던 걸 떠올리며 어딘가 깨끗한 곳에 깔끔하게 놓고 가면 누군가 '개꿀 득템'이라고 생각하며 주어갈꺼라 확신했다. 마침 지하철 입구 뒤에 빈 과일박스가 쌓여 있었고 그 위에 그것을 살포시 버리고는 숙소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과연 그 잠바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드넓은 땅 위에 밀도 낮게 볼거리들이 퍼져있는 베를린과는 다르게 마드리드는 오밀조밀 모여있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였다. 덕분에 시내 내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발품을 팔아 골목 이곳저곳과 마요르광장을 비롯해 여러 광장, 구석진 공원에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도 보고 그러다 허기가 저 길에서 파는 자그마한 하몽피자를 사 먹었다. 하몽은 역시나 맛있다. 더 맛있는 걸 먹고 싶었지만 젊고 과체중인 나에게 허기를 참는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피자를 먹고 골목을 돌자 다양한 먹거리 상점이 모여있는 산미구엘 시장이 비정하게 서있었다. 마치 산미구엘 간판이 나를 내려다 보며 "훗, 네 인생이 그렇지 뭐"라며 비웃는 것 같았다. 바로 한 골목만 참고 갔다면 더 값진 음식들로 배를 채울 수 있었을 텐데...


마요르 광장
돈키호테와 산초

시장에는 다양한 식자재와 음식들이 가득했고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웠으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미 어느정도 배가 찼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는 적었다. 겨우 타파스 두개와 화이트와인 한 잔 마시고나니 한계였다. 당시에는 정체를 짐작조차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뱀장어의 치어 인 앙굴라였을 요리를 여기서 처음 먹어보았다.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진짜 앙굴라는 아니고 흔히 대구살을 이용해 앙굴라처럼 만들어서 파는 라굴라였을 것이다. 그 새로운 담백함과 감칠맛이 무척 즐거웠다. 왜 그 많은 음식들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을까...

시장에 들어가고 처음 눈에 띈 것은 통째로 벽에 빽빽히 진열되어있는 하몽이었다.

산미구엘 시장 안에 진열되어있는 하몽

당시에는 하몽이 돼지 뒷다리 부위라는 걸 몰랐는데 살아있는 돼지의 다리보다 얇고 길어보였기 때문에 사슴다리일 거라고 추측했었다. 지금 와서 보면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 다리들을 보며 충격과 공포를 느끼기 보다는 얼마나 맛있을까? 가격은 얼마지? 하는 궁금증 뿐이었다. 얇게 저민 하몽 한 팩을 사볼까 했지만 마트에서 파는 것에 비해 꽤나 비쌌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물론 그 뒤로도 스페인에서 비싼 하몽을 사먹어 보진 못했다 ;).

다음 날, 버스를 타고 팜플로나로 향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걷는 코스는 프랑스의 생장에서 시작되지만 팜플로나에 비해 그 곳은 가는 방법도 더 복잡했고 운동부족이던 당시에 피레네 산맥을 넘기가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발도 낡아서 곧 찢어터질 것 같은 런닝화 한 켤레 뿐이었는데 그 곳엔 눈도 쌓여 있다고 했다. 어차피 완주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볍게 포기하고 팜플로나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팜플로나에 내린 뒤 무사히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숙박 등록을 하고 순례자여권을 구매하려고 운터 앞에 서 있었는데 딱봐도 한국인 같은 여성분이 카운터로 다가와 딱 들어도 한국인 발음으로 하는 영어로 직원에게 아시안 마켓에 대해 질문을 했다. S라고 하는 그 언니와는 다음날 통성명을 하게 된다. 신라면을 사려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납득 할 수 없지만 나는 이날 저녁으로 케밥을 먹었다. 스페인에 와서 베를린을 떠난지 채 이틀도 되지 않은 시점에 베를린이 그리워 그곳에서 익숙했던 터키음식을 먹은 것이다. 가게 안에 점원과 나 둘 뿐이라서 먹기 좀 뻘쭘했지만 맛은 좋았다.

대충 마을구경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엄청난 코고는 소리가 잠을 확 깨웠다. 러 단체생활을 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코고는 소리를 경험해 봤지만, 심지어는 바로 옆에서 코고는 사람과 함께 수면을 취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토록 어마무시한 소리는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 못 자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우렁차면서도 불규칙적인 소리였다. 너무 짜증나서 가방에 화풀이를 하며 귀마게를 찾아 꼈다. 당장 아침이 되면 따져물어야겠다며 이를 갈며 겨우 잠이 들었다. 하지만 코고는 게 그 사람의 탓도 아닌 걸... 그런 생리적인 일로 그렇게 화가 났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다행이 아침에 소리의 범인과 얼굴을 맞닥뜨렸을 땐 아무런 핀잔도 줄 수 없었다. 너무나 인자하고 다정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여행의 설렘을 가득안은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출발이다. 지금도 가끔 선선하고 햇볕 좋은 날 아침이면 그날의 길 위에서 맡았던 먼지 섞인 공기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제 다시 자유를 찾아 떠돌았던 그때의 기억들 사이로 새로운 여행을 계속해 보자.


팜플로나 골목길



2025년 7월 20일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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