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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원 Apr 29. 2020

풀 죽은 이야기

문초. 모기를 쫓는 풀이란 녀석이다.

봄이 되면 화원에서 조그마한 하얀 꽃을 달고 개당 1천 원의 포트에 담겨 팔리고 있다.

풀냄새의 호불호는 있지만 모기를 쫓아주는 향기 덕분에 내겐 어느새 고맙고 기분 좋은 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녀석, 모기에만 갑인 것이 아니라 번식에도 갑, 월동에도 갑, 햇빛에도 갑이다.

5월은 버려진 나무토막을 땅에 꽂아도 뿌리가 나고 싹이 돋는 꺽꽂이의 전성기지만, 구문초는 굳이 5월이 아니더라도 잘라낸 가지를 아무 때나 심으면 뿌리가 나고 새 줄기가 올라온다.

그리고 다년생 풀이면서 웬만한 풀들이 다 얼어주는 겨울에도 추위에 제법 잘 견뎌준다.

게다가 봄꽃을 제외한 많은 식물들이 강렬한 햇빛에는 타 죽기도 잘하는데 이 녀석은 직사광선에도 늘 당당하다. 오히려 강한 햇볕을 받으면 풀향기가 더욱 진해져 반경 수미터에 모기가 얼씬도 못한다.

그런 그으런 구문초가, 내겐 2년 가까이 동거 동향한 구문초가 이번 겨울에 동사했다. 혹자는 늙어 죽었다는 얘기도 하지만 내 키보다 더 크게 구문나무 수준으로 자라서 베란다 화단을 지배하던 구문왕국이 동장군에게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그만큼 지난겨울은 추웠다. 그리고 오늘. 동사한 구문초의 밑동을 톱으로 잘라 줄기를 거두고 밑동채 뿌리를 잡아 빼서 널어두었다.

이미 먼길 가셨지만 추모하는 마음 가득 담아 소중히  던져둔다. 코딱지만 한 베란다 화단이라 매장은 어렵고 마트에서 100리터 쓰레기봉투라도 사서 꼭꼭  유료 장례를 치를까 한다.

구문초가 지나간 빈자리에 그간 양지를 바라던 음지식물을 옮겨두었다. 햇빛이 뜨겁지 않은 겨울에나 있을 호사스러운 일이지.

아무튼 빈 땅이 생겼으니 올봄에는 뭘 심을까 궁리하게 된다. 지난 추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준 특급전사 식물들을 양성해 볼까도 싶지만, 새 땅엔 새 식물이란 생각도 들고 그런다.

그러나 분명 1천 원짜리 포트에 담긴 구문초 두세 마리는 우야든 심어질 것이다. 번식시켜서 모기로 고통받는 이웃에게 나눠도 주고, 지난 2년 간 집에서는 모기 한번 안 뜯기게 도와준 녀석에게 빈 땅의 권리를 안 줄 수는 없겠다.

다시 만나면 지난 생처럼 향기롭게 살아보자.

마지막으로 풀 죽은 이야기를 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꿀팁을 전한다.

모기 쫓는 풀, 구문초는 방안에 들이지 마시고 베란다나 옥상에서 햇빛 받고 잘 자라게 한 뒤 예쁘게 자라라고 가지치기해주시고, 그 잘린 가지를 모아서 방안에 두면 마르면서 더 오랫동안 천연 모기향 기능을 한다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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