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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Oct 27. 2023

【내 집이 직장이다】

  만 55세에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여기저기에서 과거의 존재를 과시했던 명함이 나올 때 마다 이게 맞나 싶기도 하기만 결정을 내렸으니 적응해야 했다. 사람을 만나면 내 소개가 어정쩡했다.      


 “저는 전에~”로 시작되는 내 소개가 맘에 들지 않았다. 과거의 대기업 임원이었고, 박사학위가 있고 이따위 이력이 무슨 소용인가? 그런 것들이 행복하지 않았는데. 나는 내가 아침형인간인 줄 알았다. 아니 아침형인간이 되어야 조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퇴직하니 나는 절대로 아침형인간이 아니었다. 늦은 아침잠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침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커피 한 잔에 클래식을 들으며, 못다 보고 꼽아 놓은 책을 편다. 아내는 회사가고 없다. 그렇게 한 두 시간 보고, 간단하게 집 청소를 한다. 그러면 11시 정도가 된다. ‘오늘은 뭐 먹지?’하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를 열어본다. 원래 요리를 하기 싫어했던 와이프는 자신이 할 줄 아는 국, 나물무침 몇 가지를 무한 반복한다. 그래서 냉장고를 열어도 변화가 크지 않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 요리사는 이제 전적으로 내가 되었다.     

 토마토 꼭지에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 꼭지를 따로 씻어 열십자 칼집을 내어 끓는 물에 넣으니 껍질이 잘 벗겨진다. 오늘 점심은 토마토스크램블을 할 작정이다. 이 음식은 차게 먹어도 맛있다. 그리고 아내가 퇴근해서 오면 상하기 전에 해치운 토마토를 보고 잘했다 칭찬할 것이다.      


 점심을 먹고서 간단하게 운동을 한다. 나름 집에 약식 홈트레이닝 장비가 갖추어져 있고, 아니면 자전거, 수영, 앞 산 트레킹 등 할 수 있어 운동 여건은 참 좋다. 그리고 들어와서 다시 아내와 아들이 귀가해 먹을 저녁을 준비한다. 장은 잘 보지 않는다. 퇴근하는 아내에게 부탁을 하는 편이다. 요리할 메뉴가 정해지면 인터넷에 공개된 레시피를 보고 재료 종류를 문자로 남긴다. 그러면 몇 가지를 사들고 온다.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시절 지방대를 다녀서 자취를 했는데, 내 방에 친구들이 오면 김치찌개는 기본이요. 제육볶음으로 사치를 누리기도 했었다. 물론 모두 내가 만들었고, 그것이 멋진 술안주였다. 그런데 ‘아빠는 요리사’라는 광고카피가 들리면서, 주말 주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제 주말은 기본이고 매일 칼을 잡고, 설거지를 하니 주부습진이 생긴다.     


 진정한 전업주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싫지 않다. 내 요리를 먹는 가족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우리 집은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나는 전업주의 정의를 스스로 이렇게 내렸다. 메인 요리가 아니라 냉장고 안 보이는 재료로 밑반찬을 만들 수 있다면 전업주부의 경지에 오른 것이라고 말이다.     

 오늘은 냉장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꽈리고추, 진미채포 등을 밑반찬으로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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