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장길산』 읽기
올 추석 때는 딱히 어딜 가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대체공휴일까지 나흘의 시간,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머리를 굴려보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다. 바로 대하소설 읽기다.
살면서 대하소설을 얼마나 읽어봤을까? 십 대 때 읽은 몇몇 판타지 소설 시리즈나 <해리 포터> 시리즈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걸 대하소설로 칭할 수 있으려나? 그걸 빼면 이십 대 때 읽은 <태백산맥>, <이문열 삼국지>가 전부다. <토지>나 <장길산>도 시도해 봤지만 1권을 채 다 읽지 못하고 포기했더랬다. 낯선 단어와 방언이 난무하는 두 소설은 내게 너무 높은 벽이었다.
대하소설은 길고 긴 호흡을 따라가기 힘들고, 혹여나 빠져들면 다른 일에 집중을 잘 못할까 봐 직장 생활을 하는 나로선 도전할 엄두가 잘 나지 않는 장르다. 그러면서도 책을 좋아하기에 마음 한켠에는 미처 마치지 못한 숙제 같은 찝찝함으로 대하소설 목록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 황석영 작가의 <장길산>이 있었다.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황석영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첫 번째고, 옛 시절 이 땅 민중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접해보고 싶은 마음이 두 번째 이유다. 언젠가 도전해 보리 아득하게 마음만 먹었다가 드디어 때를 만났구나, 싶었다.
연휴를 앞둔 지난 목요일, 퇴근길에 동네 도서관에 들러 장길산을 빌렸다. 1980년대 초판이 나온 『장길산』은 세월이 흐르며 여러 판본이 나왔고 2004년에 열두 권짜리 개정판이 나왔는데, 재작년에 창비에서 4권짜리 특별 합본호를 냈다. 한 권당 단행본 세 권이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나흘의 연휴, 네 권의 책. 방정식은 간단하다. 하루에 한 권 읽으면 미션 클리어다. 과연 대하소설 읽기는 순조롭게 됐을까?
아직 연휴가 끝난 건 아니지만, 나흘 중 사흘 째인 오늘 중간 정산을 하자면.... 대하소설 읽기 프로젝트는 처참한 실패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이제 곧 4권을 들어가야 마땅하지만 아직도 1권에 머물고 있다...
나온 지 오래되어 낯선 단어가 많고, 조선시대 생활상을 다룬 지라 낯선 한자어가 많아 수고롭게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는 핑계 하나, 한번 읽고 넘어가기엔 아쉬운 내용들과 문장들이 많아 옮겨 적는데 시간을 쏟았다는 핑계 둘, 추석이지만 밥은 내 손으로 차려먹어야 하고 돌봐야 하는 고양이 둘은 건강하게 뛰어놀며 때때로 내 손길을 기다린다는 핑계 셋까지 이유를 대보지만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시작할 때의 자신만만함과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내 마음엔 약간의 헛헛함과 아득함이 맴돌고 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호기롭게 대하소설을 독파한다는 생각을 한 걸까? 참나, 나도 나를 모르겠다.
한번 궤도에 올랐으니 어찌 됐든 『장길산』은 끝까지 읽을 테다. 이제 단어들도 익숙해지고 전개로 재밌어지는지라 속도도 붙을 테니 고지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겠지. 도전은 실패했지만 연휴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내고 시작도 못했을 일, 한가위 달님한테 괜히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