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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Mar 09. 2024

동백꽃 필 무렵에 알게 된 이야기

 동백의 화려한 붉은 얼굴을 만나기까지, 나름의 묵묵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동백나무에 마음을 빼앗긴 뒤 설레는 마음으로 키우기 시작했던 작은 동백은 몇 년 동안 꽃을 피울 기척 없이 반질반질한 초록잎만 뻗어갈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언젠가 기다리면 꽃이 피겠지라는 마음으로 동백을 돌봤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건, 더욱이 그 기다림이 설렘을 품고 있다면 어떤 기다림은 기쁨이 되기도 한다는 걸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동백의 붉은 커다란 꽃이 그러했다.


 몇 년 동안 작은 화분에서 초록빛을 발하던 동백은 하나둘씩 잎을 떨궈내더니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했다. 책상 옆자리를 내내 함께 했던 반려식물이 떠난 헛헛함은 그동안 내가 동백나무에게 쏟았던 마음을 수시로 상기시켰다. 매일 시선이 닿는 곳에 자리했던 붉은 동백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리워 지난 늦가을에 다시 동백나무를 데려와 화분에 옮겨 심었다.


 오래도록 함께 하기를 소망하면서 동백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꽃을 피워내는 식물들과 초록잎을 감상하기 위한 식물을 돌보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죽지 않고 초록의 생명을 유지한다면 잘 키우고 있다고 막연히 믿고 있었으니, 동백이 지난 몇 년 동안 꽃을 피우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나의 무지함으로 인해 작은 동백은 꽃도 맺어보지 못하고 생명을 꺼트렸던가 싶어서 미안함이 그득한 반성을 했다.

 

 대체로 꽃을 피워내는 식물들은 꽃을 피워내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꽃봉오리를 맺는다. 동백은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추위를 겪어내야만 꽃을 피워낸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조심해야 할 것은 추위의 범위를 조절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동백은 영하권의 추위를 만나게 되면 죽어버리고 만다. 동백을 키우기로 결정한 집 베란다가 영하로 떨어지지 않게끔, 그러면서도 바람도 만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건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습기를 좋아해서 수시로 물을 분무해 주라니... 이번에 만난 동백을 잘 키울 수 있을지 의문이 가득했다. 나름 식물을 잘 키우는 식집사로 살고 있지만, 이미 떠나버린 동백 때문인지 자신감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저 '붉은 동백이 피는 매일의 풍경을 집에서 보고 싶다'라는 이 마음이 두려움을 압도해 버리는 것을. 그렇게 집에 동백나무 한그루가 심어졌다.


 작년 11월에 만난 동백은 이미 꽃봉오리를 가진 상태였다. 동글동글 귀엽게 매달려 있는 여러 개의 꽃봉오리를 보면서 수도 없이 꽃이 피어나는 상상을 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피워낼 것 같은 연둣빛의 여린 동그란 꽃봉오리들을 보면서 설레는 마음은 넘실거렸다. 그러나 11월이 가고, 12월이 가고, 혹독한 추위가 찾아온 1월도 지나고, 곧 봄이 올 것 같은 2월이 찾아와도 동백은 처음에 집에 왔던 모습 그대로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닌가? 아침에 일어나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유리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동백의 안부를 물었는데, 동백은 상록수처럼 푸르기만 했다. 이제 추위는 물러가고 햇볕은 봄의 기운을 담고 있는데, 올해 동백을 만나는 것은 무리인가 싶어지고,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복기하듯 지난 몇 개월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영하의 날씨는 물러가고 영상 10도까지 올라가는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날이었다. 거리를 걸으면서 더 이상 추위에 옷깃을 여미지 않아도 되고 호달달 떨면서 걷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 정말 이제 봄이 왔구나 싶었다. 퇴근 후 집에 갔을 때 나는 동백을 마주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꽃봉오리들이 어느새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고 빨간 꽃잎들이 터져 나오기 직전처럼 커져있었던 것이었다! 설렘 가득한 기다림의 결정체를 며칠 후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동시에 두 송이나 피어나기 위한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꽃을 피울 때 식물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수분을 필요로 한다기에 동백이 목마르지 않도록 물을 주고 꽃잎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었다.


 정말로, 며칠 뒤 우리 집 베란다에는 왕방울보다 더 큰 붉고 탐스러운 동백꽃 두 송이가 피었다. 겨울 내내 기다린 보고 싶은 붉은 얼굴을 드디어 만난 것이다. 한참이나 동백나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관찰했다. 상처 하나 없이, 작은 티 하나 없이 피어낸 얼굴을 바라보면서 신비로움과 함께 반가움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기다림에 대한 응답처럼, 쏟아부은 정성에 대한 보답처럼 동백나무는 꽃을 피워 내밀어 주었다.


 동백꽃을 보며 생각했다. 꽃을 피워낸다는 건 무언가를 견뎌냈다는 말이라고. 동백이 꽃을 피우기 위해 만나야 하는 추위는 자칫하면 제 목숨을 가져갈 수도 있는 요소다. 동백의 입장에서 보자면 추위는 고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위는 꽃을 피워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동백의 생에 새겨진 숙명인 동시에 영광의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 제목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힘든 고난의 시간이 지나면 동백꽃과 같은 환희의 순간이 온다는 것을 한 편의 드라마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백꽃이 피기 위한 추위라는 고통의 시간, 그리고 그 추위를 감내해 내는 굳건한 마음이 딛고 있는 시간을 겪어내야만 찾아오는 진정한 봄의 초입, 바로 그 계절의 찰나를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세 단어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견뎌낸 자만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붉은 황홀함 앞에서 내가 피워내고 싶은 꽃을 위해 나는 어떤 고난을 스스로 감내하며 계절을 나아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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