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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에이치 Aug 20. 2020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친구와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무슨 말들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맥주도 한잔 했다. 분명 반가웠고 순간순간 진지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건 틀림없다. 그런데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는 기운이 없고 어지럽다. 긴장하고 만났다거나 억지로 만난 건 아닌데도 기가 다 빨렸는지 집에 와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조금 어릴 때는 몇 시간이면 괜찮아졌는데 지금은 하루 이틀 누워 지내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긴장을 풀고 친한 친구를 만났을 때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주변에 지인들에겐 어떠했을까.. 반가워서 하는 말들이지만 사실 횡설수설 입을 열면 실수가 많고 뭔가 부자연스럽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려면 온 몸의 신경들이 촉각을 곤두세워 손에서 땀이 나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애써 아닌 척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고 얼마 전까지 만나 웃고 떠들었던 사람들의 얼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기라도 하면 무조건 경계모드다.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거나 뾰족하게 날이 바짝 서서 상대방의 눈빛에  지지 않으려고 한껏 쏘아볼 때도 있다. 사실 쳐다보는 사람은 나를 알아서 그랬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마 쌓인 오해도 많으리라.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증상들에 시달려왔다.

소심한 성격에서 오는 것들이라고 치부해 버렸던 이런 증상들이 심리상담소에서는 우울증을 동반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 인터렉티브한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의 잘못도 분명 있을 텐데 언제나 먼저 나를 탓하는 버릇, 천성으로 타고난 예민한 기질에서 오는 문제라고만 여겼다.

때때로 무의식 중에 알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자각하지 못했다. 인간의 삶이란 다 거기서 거기니 대부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실 생각해보면 몇 번이나 본 사람들의 얼굴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바보가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어릴 적 겪은 큰 인명사고 때문이었는지, 인간에 대한 신뢰나 믿음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대인 공포증을 겪게 된 시점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그런 감정들이 차곡차곡 두껍게 쌓여 이내 터져버릴 직전까지 왔을 때야 비로소 내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지 모를 이런 증상에 시달리는데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아서 일까, 두렵지만 여전히 사람이 좋다.


문을 열고 밖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디는 순간에 두려움의 대상들이 별거 아님을 깨닫는다.

하지만 문 밖으로 내디뎌야 하는 그 한 발이 매번 어렵다.



  

  늘 공존하는 어쩔 수 없는 양가감정에 휘둘리며 피곤하게 산다.

두렵지만 두렵지 않고, 무섭지만 무섭지 않은.

늘 복잡했다가도 한순간에 단순 명료해지고 알다가도 모를 행동들을 한다.

인파가 많은 곳에 가더라도 예전 같았으면 뭉개지고 흐릿해서 안보였던 사람들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고 스쳐가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도 기억 속에 남는다.


긴장은 되지만 더 이상 손에서 땀은 나지 않는다.

심리상담을 받은 후부터는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많은 일을 겪고도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브한 나, 지금도 사소한 무언가에 대한 자책을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착한 콤플렉스에서도 벗어나고 이제 그만 그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고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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