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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에이치 Aug 30. 2020

앙리 마티스의 'Dance'와 같이

 어느 날 친한 동생이 나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동성이어서 괴롭다고.

그런 자신을 나에게까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고 말이다.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은 편견이 있을지언정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적 소수자들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엔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을 하기도 전이라 이성애적인 관계만이 당연하고 정상적인 관계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는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던 성적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였던 친구들이 당시에도 있었고 그들과 편견 없이 잘 지냈다. 그러나 친한 동생이 나에게 커밍아웃할 때 왜 하필 그 사람이냐고 왜 동성이냐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선입견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도 그 동생 앞에선 결국은 묵인되고 발설해서는 안 되는 동성애라는 금기어를 입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던 사회의 한 구성원일 뿐이었다. 술잔을 바라보던 동생이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그냥 그 사람이 좋은데 동성이었다고, 어쩔 수 없었노라고-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소주잔에 담긴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리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안다. 비록 깜깜한 어둠에 갇혀 보이지 않더라도 멀리서 희붐하게 보이는 빛이라도 따라가고 싶은 심정일 것 같다. 끝도 없이 높고 단단한 벽을 허물만한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사회적 약자인 그들이 건전한 민주사회에서 다양성을 존중받고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냈다면 좋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예전 우리의 시민의식과 사회적 분위기에선 무조건적인 힐난의 대상이었고 절대적으로 이해받지 못할 이질적인 존재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이성애자들처럼 주변에 알리고 행운을 빌어달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에 이어 이반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사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함을 처음으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준 홍석천씨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단단하고 높은 벽 앞에서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해준 그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많은 공분을 산건 맞지만, 한 발자국도 나가기 힘들 만큼의 칠흑 같은 어둠속에 갇힌 존재들에게는 아침이 오기 전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을 선사해준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게 삶인가. 세상에 쉬운 일이란 결코 없는 것 같고 한 뭉텅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아무것도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직면한 모든 것이 그냥 어렵기만 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만사에 정답 같은 건 없다. 뿌연 안개가 앞을 가로막아도 차근차근 걷어내며 한 발씩 나아가면 된다. 마음먹은 대로 용기 내어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용기 내어 나에게 커밍아웃해준 친한 동생이 문득 고마울 뿐이었고 어려운 상황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에게 진지하게 고백하던 친한 동생은 얼마 못가 그 동성과 헤어졌다.

지금은 이성애적인 관계로 만난 사람과 결혼해서 자식도 여럿인 사람이 되어있다. 아마도 사람이 좋아서였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충실했던 순수함일 거라 생각한다.


나는 예전에 대학에서 교양수업으로 동성애와 양성애에 관한 이론을 접한 적이 있다. 지금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한 학기 동안에 가볍게 잠깐 배웠던 교양수업 말고 성장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배움을 통해 성적 소수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가르치면 좋겠다.


벌거벗고 있는 사람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푸르른 공간에서 손을 맞잡고 각자의 모습대로 추는 춤이 평화롭고 멋져 보인다. 작가는 생명력이나 역동성, 삶의 에너지를 화폭으로 담아냈다고 하지만 내가 느낀 그의 그림은 화합이다. 내가 바라는 우리 사회의 모습도 앙리 마티스의 Dance에서 느껴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철학적 사고를 하고 인문학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키울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더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나중에 소중한 존재들이 어른이 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에 내몰리지 않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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