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함께하는 여행 - 올레길
스물여섯 살의 배낭여행, 2020년도 올레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올레길 1일차: 시흥-광치기 (15.1km)
1코스를 알리는 스탬프와 푯말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헛웃음도 나오고.
"또?" 다시 걷겠다는 결심을 뱉었을 때 제일 많이 들은 소리였다. 그때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할 말이 없기도 했고, 뚜렷하고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순위였던 해외를 나가지 못하니 가진 선택지를 펼쳐 두고 가장 마음이 가는 차선책을 골랐을 뿐이다. 순례길을 걸으며 언젠가 올레길도 걸어봐야지 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저 훗날이 되겠지 했지 이렇게 빨리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우연이라는 작은 조각들이 모여 만든 결과였다.
촘촘히 수를 놓은듯한 별빛이 그리워 별빛투어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간밤에 구름이 많이 껴 별을 볼 수 없었다. 자연의 힘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지만 아쉬운 마음이 다 감춰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음에 꼭 별보러 다시 오라고, 응원한다는 말을 건네는 사장님과 인사를 한뒤 가방을 고쳐 맸다.
1코스는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해 광치기 해변까지 걷는 코스였다. 거리는 총 15km. 걸으며 말미오름과 알오름을 지나고 종달리 소금밭을 거쳐 광치기 해변에 이르면 끝이다. 제주에 몇 번 왔어도 오름을 제대로 맛본 기억이 없어 더 기대가 되는 코스였다. 그런데 이거 어디로 올라 가야 하는건지. 푯말앞에서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결국 주변에 물어 길을 찾았다.
투박하지만 정교하게 쌓아 놓은 돌담과 길 옆 가지런하게 펼쳐진 밭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돌담 사이에서 첫 리본을 발견했다. 앞으로의 여정동안 든든한 길라잡이가 되어줄 표시이기에 괜스레 신이 났다. 10분정도를 걸었을까, 금방 말미오름이라는 걸 알려주는 간세 표지판과 화살표가 나타났다. 정방향으로 가고자 하면 파란색을, 역방향으로 가고자 하면 주황색을 따라가면 된다고 했으니, 간세의 머리가 향하고 있는 쪽으로 나아갔다.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말미오름은 오르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금세 한눈에 마을을 담을 수 있었다. 길쭉한 푸른 풀 속을 헤치고 가다보면 새 알을 닮았다는 알오름으로 이어졌다. 푸른 하늘색과 새하얀 구름, 싱싱한 청록색의 풀까지, 모두 어우러져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은 풍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보고싶은 만큼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비없이 내리쬐는 햇빛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온몸이 녹아 내리는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게하 사장님의 말이 맞았다. 아직 걷기에는 덥다고 하셨는데 직접 걸어보니 무한 동의를 하게 되는 말이었다. 뜨거운 햇빛 때문에 경치를 즐기기는 커녕 혼이 빠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제주의 햇볕은 뜨겁다 못해 따가웠고 날카롭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어찌나 기세가 좋던지 이 얼마 안되는 높이를 오르는데 양 볼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고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지 오래였다. 게다가 어깨에 큰 배낭까지 매고 있으니 땀이 식을 새가 없었다. 사장님의 걱정어린 말에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는데 8월의 제주는 예상보다 뜨거웠고 무자비했다.
제발, 카페야 나와라. 한시간을 걸었을까. 내 정신인지 무슨 정신인지 모를즈음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이상한 나라에 간 앨리스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홀린듯 문으로 들어갔더니 땀으로 떡진 머리에 붉게 익은 얼굴을 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뽀송뽀송한 그들 사이에 앉아도 되는건가 잠시 고민했지만 이 쾌적한 공간을 나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 뭐라도 시원한 액체를 넣는게 우선이었기에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헉..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평소에는 사줘도 안 먹는 음료였건만, 가장 시원한 음료겠지 싶어 골랐다. 한시라도 빨리 흡입하고 싶었지만 아직 음료가 준비되지 않은 테이블이 있어서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손님, 죄송한데 저 분 커피 먼저 준비해드려도 될까요."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렸지만 뒤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간신히 제 정신을 찾는데 금방 음료가 나왔다. 저분이 나였구나!
차가운 음료를 꿀떡꿀떡 넘기니 머리가 띵했다. 커피를 왜 먹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이 순간이후로 이해가 되었다. 심지어 생전 처음으로 아메리카노가 맛있다고 생각했으니 말다했지. 이 쓴 걸 왜먹지에서 이래서 먹는구나로 바뀌었다. 이렇게 태세 전환을 할 줄이야.
뭘 먹었어도 인생 음료가 되었겠지만 아아를 선택한 건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그 아찔했던 목넘김을 절대 잊지 못하리라.
잠깐의 쉼터를 떠나니 바로 숨이 턱 막혔다. 감히 마주볼 수도 없을정도로 뜨거운 볕에 고개는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무인 책방도 지나고, 소금밭도 지났다. 주욱 널어놓은 한치들을 보며 살짝 입맛을 다시긴 했지만 목화휴게소는 지나치기로 했다.
길은 한적했고 걷는 사람도 없고 마을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홀로 걸으며 언제 어떤 사람을 마주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제일 걱정이었다. 사람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좋아진 세상이라지만 사고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으니까 최대한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특히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어디선가 불쑥 사람이 튀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변을 더 경계하며 걸었다.
홀로 한참을 걷다 올레길을 걷는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뻘 되시는 분들이었는데 겁도 없이 혼자 걷는 거냐고 걱정을 하시면서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다. 나란히 함께 걸은건 아니지만 그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안도가 되었다.
더위에 넋이 빠졌지만 걷고 또 걸으니 마침내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다. 끝이다 끝. 온갖 에너지를 다 쏟았더니 탄수화물 생각이 간절했다. 이럴때보면 영락없는 한국인이라는걸 새삼 깨닫는다. 밥과 국물이 함께 있는 메뉴를 찾다가 해물라면 집을 발견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도 길던지 남김없이 싹싹 해치웠다.
카페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 달콤한 아이스크림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썸머라떼를 주문했다. 이미 빵빵하게 먹은탓에 과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커다란 눈사람이 올려진듯한 비주얼을 보니 외면할 수 없었다. 튼튼하고 넓은 위장을 믿어보기로 했다.
걸은지 이제 고작 하루인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더위가 이렇게 큰 복병이 될 줄이야. 예상하지 못해서 더 당황스러웠다. 이 날씨를 견딜 수 있을까? 큰 배낭을 들고 잘 걸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혼이 나가는 줄 알았으니까. 얼굴이고 팔이고 두피고 벌겋게 익은걸 보니 더 막막했지만 조금 더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홀로 넓은 방을 쓴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착잡했다. 이게 정녕 사람 얼굴이 맞는가... 급한대로 챙겨온 팩을 꺼내 화끈거리는 얼굴에 붙였다. 볼수록 암담한 이마와 팔을 보니 헛웃음만 나왔고 새로운 피부색을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꽤 필요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넘어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얼음 컵에 쫄쫄쫄 맥주를 따라 바닷가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걸터 앉았다. 크게 한모금 들이키니 조금 위안이 되는 거 같기도 하고.
바다에서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나 둘 불빛이 짙은 바다를 밝히기 시작했고 조금씩 늘어났다. 잔잔한 물결 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배들은 더할나위 없는 훌륭한 안주였다. 큰거로 살걸. 안주가 좋으니 맥주가 금방 동났다.
벌써 내일의 더위가 걱정이 됐다. 또 얼마나 매서울까. 아는 맛이 더 무섭다더니, 더위도 마찬가지구나. 제주의 더위를 하루 겪었을 뿐인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내일은 숙소에 짐을 놓고 다녀올테니 오늘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오랜만에 가는 우도라 기대가 되지만 한껏 뜨거울 우도를 생각하니 쉽사리 잠들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