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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Mar 15. 2021

추억은 정말 힘이 없을까

엄마의 영정사진을 고르며


떠나자, 에피소드 넝마주이가 되기 위해


 돈만 모이면 비행기를 타던 때가 있었다. 여행에 미쳐 지내는 사람들에 비하면야 소박한 수준이었지만 내 형편에서는 제일 비싼 유흥이었다. 나중에는 "또 나가?!"라는 놀라움과 묘한 비난이 섞인 주변의 반응이 번거로워서 신출귀몰했던 그 시절. 내게는 여행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여행은 나이 들어 우려먹을 추억을 수집하는 일'이라는 게 나의 개똥철학이었다.


 그때까지 내 주위의 어른들은 나이가 들수록 좀처럼 요즘 얘기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근황을 묻는 것 같다가도 결국에 열을 올리는 것은 옛날 이야기였다.  A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전혀 다른 B에 대해 얘기하다가도 마지막은 늘 몇십 번도 더 들은 '그 얘기'로 흐르고야 마는 것이다. 두 갈래 이상의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두물머리처럼 어른들에게도 이야기 두물머리가 몇 군데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귀엽고 웃긴 할머니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인 사람으로서, 왕년의   되는 에피소드로 돌려막기 하는 가난한 이야기꾼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여행이다. 여행은 새로운 에피소드를 주워 담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니까. 가성비는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가심비(가격 대 마음의 만족도)만큼은 보장되는 방법. 그렇게 나는 '에피소드 넝마주이'를 꿈꾸며 틈만 나면 짐을 싸기 시작했고, 이 여정에 가장 자주 동행했던 인물이 바로 엄마다. 대부분은 혼자 떠나는 편을 택했지만 친구가 있었으면 싶은 순간에는 무조건 엄마를 불렀다.   


좋은 여행 메이트가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


 엄마는 좋은 여행 메이트였다. 몇 군데를 찍었느냐가 중요한 전형적인 패키지형 여행가인 점은 나와 맞지 않았지만, 엄마에게는 그것을 잊게 하는 두 가지 특장점이 있었다.

 첫째, 엄마는 감탄에 헤프다. 이건 나와 엄마가 닮은 점이기도 한데, 우리는 기대 이하의 곳을 가도 꼭 감탄할 만한 것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들이다. 닭갈비 맛집 이래서 갔는데 맛이 영 시원찮다면 하다못해 달려 나온 밑반찬이라도 맛있다고 칭찬해주는 식이다. 만약 그 식당 앞에 정원이라도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면 "덕분에 꽃구경은 실컷 했네"라고 말할 사람이 우리 엄마다. 그 덕에 애써 모시고 간 여행지에서 가는 곳마다 시큰둥하고 불평하는 모습으로 혈압이 올랐던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16년 직장 퇴사 기념으로 떠난 유럽여행

 둘째, 엄마이야기에 반응하는 사람이다. 이건 전 직장 퇴사 후 엄마랑 유럽여행을 갔을 때 알게 된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야기에 굉장히 집착하는 편이다. 결과물 보다도 비하인드 스토리에 더 열광하는 사람이랄까. 당시 우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스위스를 3주에 걸쳐 둘러보았는데, 휘황한 성당에 입이 벌어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좀 피로해졌더랬다. 그때마다 우리를 깨웠던 건 숨은 이야기들이었다. 가우디가 완성한 경이로운 낙원을 보는 일보다 천재 건축가의 비루한 최후에 더 마음이 쓰이곤 했다. 알함브라궁전을 위해 들르는 그라나다에서도 우리에게는 골목골목을 돌며 동네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던 워킹 투어가 더 인상 깊었다.

 아마 엄마가 이렇게 이야기에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내가 엄마와 자주, 여러 곳을, 오래도록 여행하게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한편으론 엄마가 자신의 이야기에도 그만큼 적극적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엄마는 정작 자기 이야기를 쓰는 데는 너무나도 소극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추억은 힘이 있을까


 엄마가 아픈 뒤로도 우린 꽤 자주 떠났다. 엄마가 걸을 수 있을 때는 비행기도 몇 번 탔었고, 걷기가 힘들었을 때는 목발과 휠체어를 싣고 떠났다. 최근 내가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우리의 방랑벽도 한 풀 꺾였지만 그래도 짬을 내보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여전히 나는 여행을 '우려먹을 추억을 수집하는 '이라 여겼었고, 추억은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끔 말문이 막혀 엄마와  사이에 공백이 생겨도 추억으로 메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설 연휴에 엄마랑 병원에서 같이 지냈던 3일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시간 우리가 공들여 쌓아  추억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깨달았다. 제대로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엄마를 위해 추억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슬프기보다도 너무 당혹스러워서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영정사진을 고르며 그간의 우리를 정성스럽게 돌아봤다. 사진은 생각보다 금방 골랐다. 아프기 전 모습은 너무 시의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제외하고, 엄마가 평소에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입매도 고려해서 내 눈에 제일 엄마다운 사진으로 골랐다. 보통 자녀들이 부모의 영정사진을 고르며 제대로 찍어놓은 사진이 없는 것에 한번 더 무너진다던데, 나는 사진이 너무 많아서 다행히 그 죄스러움은 피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추억이 힘이 되는 순간이 있었는지 묻지 못했다. 앞으로도 영영 엄마의 뜻은 알길 없지만, 적어도 남은 우리들은 켜켜이 쌓은 추억에 기대어 씩씩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해본다.


 2021년 3월 7일 오전 10시 3분.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가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셨습니다. 비정규가족 D+240일. 오늘도 남은 우리 가족은 모두 안녕합니다. 엄마,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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