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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Feb 09. 2021

코로나 시대가 만든 '新이산가족'

코로나 시대에 환자 보호자로 산다는 것


Love is touch, touch is love

 

 구글 포토가 친절하게 찾아준 일 년 전 오늘이 너무 낯설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카페에서 돌쟁이 아기와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진이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1월 말즘이었으니 기껏해야 일 년 전 일인데도, 이상하게 코로나 이전의 일상이 까마득하다. "뭐 얼마나 가겠어"했던 게 "끝이 있긴 할까"로 변하면서 매일 무기력을 학습하는 기분마저 든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고단한 시절. 문득 우리가 훗날 이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해졌다. 학교를 못 간 아이들은, 아이들이 오지 않는 텅 빈 학교에서 근무하던 이들은, 장사하는 자영업자들과 수입이 일정치 않은 프리랜서 들은, 돌봄 노동을 고스란히 떠안게 돼버린 엄마들과 돌봄이 필요한 노약자들은 이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엊그제 무심히 뉴스를 보다가 미국의 한 노인보호시설에 설치되었다는 '허그 텐트'를 보고 울컥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가족 간 면회가 어려워지자 시설 관계자들이 면회소에 특수비닐로 제조한 텐트를 만든 것이다. 텐트에는 팔을 넣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서 환자와 보호자가 서로 안전하게 포옹을 하거나 손을 잡고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love is touch, touch is love라는 가사를 쓴 존 레넌은 그로부터 50년 후 이런 touch가 생기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미국  콜로라도 주 루이빌의 한 노인보호시설에 설치된 일명 '허그 텐트'[출처: 서울신문]

 우리나라에서도 요양보호시설이나 병원에서 대면 면회가 금지되거나 제한된 지 벌써 1년째다. 이번 설 연휴에도 요양시설 대면 면회가 사실상 금지되면서, 추석 때도 못 뵈었던 부모님을 설에도 볼 수 없어 애타는 자녀들이 많을 것이다. 세상과 단절된 채 병원에서만 생활하는 환자가 겪는 고립감과 우울감은 또 어떻고.


 이처럼 코로나 전쟁의 참상이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경제지표겠지만,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으로 인한 손실도 못지않게 크다. 그중에는 최근 우리 모두가 호소하는 '코로나 블루'의 우울감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2003년에 홍콩에서 사스가 창궐했을 때 그 해에 노인 자살률이 급증했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이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암 요양병원에 엄마를 모신 내가 당면한 문제기도 하다.


'접속'만 있고 '접촉'은 없는 세상  


 '위드(with) 코로나'시대에 환자로서,  보호자로서 최선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 엄마가 있는 병원도 보호자 면회가 금지된 상태다. 그래도 다행히 산책을 핑계 삼아 외출하는 것은 모른척 해줘서 밖에서 잠깐씩이라도 얼굴은 볼 수 있었다. 혹한과 코로나로 달리 갈 곳 없던 우리의 접선 장소는 늘 차 트렁크였다. 매번 성인 세명과 유아 한 명이 차 트렁크에 몸을 구겨 앉아서 팥죽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크리스마스 파티도 했더랬다. 그런데 엄마가 걷는 게 점점 불편해지면서 외출이 요원해진 뒤로는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말 그대로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다른 의료 시설도 사정은 비슷하다. 고통을 덜고 존엄한 생의 마지막을 돕는 호스피스 시설도 상주 보호자가 1인으로 제한되면서, 가장 사랑하는 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비탄하는 유족들이 많다. 이에 기관에서 비대면 소통 창구를 만들고 있지만, 보호자 입장에서 '접촉'이 없는 '접속'은 여전히 불안하다. 환자로서도 아픈 와중에 추가적인 감염 걱정을 해야 하는 현실이 불안을 더 가중시킨다. 한편으로는 이마저도 힘든, 디지털 도구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분들이나 의식이 온전치 않은 환자를 둔 가족들은 오죽할까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비정규 가족의 공식 면회소(트렁크)에서 한 크리스마스 파티. 엄마가 어서 일어서서 다시 '트렁크 피크닉'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식구들처럼 코로나가 만든 新이산가족이 많을 것이다. 개중에는 보호자가 1인으로 제한되면서 가족 중 한 사람의 노동력에만 기대는 가정도 있을 테고, 코로나를 핑계로 도덕적 해방감을 누리는 자식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처럼 가족들 위한다는 마음으로 완고하게 이산가족 시스템을 유지하겠다는 환자도 있을 테고, 나처럼 새까맣게 탄 가슴으로 반대하는 보호자도 있을 거다. 또 거꾸로 코로나로 인해 시설을 이용할 수 없어 집에서 사회와 단절된 채 돌봄 노동을 제공 중인 가족들도 있으리라.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깥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격리나 고립이 되지 않도록, 바깥과 통할 수 있는 안전한 창을 새로이 내야 하는 이유다.

 

 나란 사람은 왜 꼭 겪고 나서야 깨닫도록 설계된 것인지 요즘 매일매일 부끄럽다. 코로나 이전에도, 엄마가 아프기 전부터도 주변에 이런 어려운 사정들은 늘 있었을 텐데 왜 헤아리지 못했을까. 어찌 보면 엄마가 아픈 것은 비극이 분명하지만, 그 덕에 내가 조금 덜 부끄러운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감사하다. 역시 엄마는 병상에 누워서도 나를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키워낸다.


 모쪼록 이번 설은 아픈 사람도, 그 곁에 있는 사람도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비정규 가족 D+206일. 오늘도 우리 가족은 모두 안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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