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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Jan 23. 2021

두돌쟁이가 해주는 대리 효도

 

 '오늘은 진짜 써야지, 뭐라도 써야지' 염불만 외다가 세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 식구는 양평의 혹한에 정신이 거의 나가다시피 했고, '비정규 가족'에서 '이산가족'이 되었다. 같은 집 2층에 살던 엄마가 암 요양병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엄마의 치병을 위해 2년짜리 '비정규 가족'으로 뭉친 지 반년도 못되어 벌어진 일이니 우리에게는 퍽 가혹하다. 덕분에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원망을 마음에 덕지덕지 바르며 지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요구받는 이 끔찍한 시대 덕을 좀 본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추한 몰골을 들키지 않았으니. 그리고 그동안 엄마는 꼭 필요한 것 빼고는 다 버리려는 사람처럼 전보다 살이 더 빠졌다. 그런데 신기하게 야윈 것도 또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 어떤 모습이든 엄마는 엄마니까.


 이산가족이 된 뒤로는 우리 일상도 조금 달라졌다. 요즘 우리는 거의 매일 엄마를 보러 양평에서 청평으로 간다. 여기서 '우리'는 남동생과 나, 그리고 두돌쟁이 내 딸이다. 동생은 아침마다 녹즙을 짜고, 나는 엄마한테 전할 편지를 쓰고, 엄마는 병원 급식에서 손녀에게 줄 고구마를 몰래 챙겨 나오는 날들. 이 반복되는 매일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바로 내 딸이다. 두돌쟁이 내 딸.

 

 아이는 어둠 속에 침잠해 있는 우리를 끌어내 기어코 웃게 만든다. 엄마 안색을 보면 막막해져 버려서 할 말이 없다가도, 모두가 눈으로 아이를 쫓다보면 어느새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이 위대한 능력을 아들딸들이 아닌 손녀가 갖고 있다니!  물론 나는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엄마도 이 작은 생명체에 마음 붙이고 기대었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으리라. 그렇게 갓 두 돌 지난 아이는 지 엄마 대신 할미에게 대리 효도를 한다.     


 나는 2014년 봄에 결혼을 했고, 5년 뒤인 2019년 1월에 똑띠가 태어났다. 사실 신혼을 즐기기에 5년은 살짝 넘치는 시간이다. 우리 부부는 어디 나가 '딩크입니다'라고 소개한 적은 없지만, '아이가 없는 삶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나의 엄마와 나의 딸. 세상에서 내가 가장 극진히 아끼는 두 사람.

 엄마가 처음 암 진단을 받던 그날도, 우리는 한 주 뒤 떠날 네팔 여행 준비로 바빴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창피한데 네팔 여행의 목적은 하나였다. 바로 '2세 계획'.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서 아이를 낳을 것인지, 이대로 살 것인지 산신령의 대답을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떠나기 직전 엄마가 암이라는 소식을 들었고, 우리는 산신령의 대답 없이 아이를 낳기로 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태어날 아이에게는 이기적으로 들릴 테지만, 손주가 생기면 엄마 병이 더 빨리 나을 거라 생각했다. 과연 나의 가설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분명한 건 아이를 낳은 뒤 나는 매일 엄마 덕을 보고 있다. 아이는 그런 존재다. 탄생 만으로 효도도 하고 대리 효도도 해주는 존재.


 엄마가 요양병원으로 들어간 후 가장 겁이 났던 것은 내 딸이 극진하던 외할미 사랑을 잊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두 돌인 아이가 며칠 안 보면 잊는 게 당연한 건데도, 혹시나 그게 우리 엄마의 마음을 서운하게 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아이가 지 할미에게 조금만 시큰둥해도 신경이 쓰이고, 혹시라도 나날이 쇠약해지는 할미의 얼굴을 못 알아볼까 봐, 이제 한창 말을 시작한 아이가 할미한테 상처되는 말을 할까 봐 매일 불안했다. 급기야는 매일 밤마다 아이를 재우면서 "똑띠야, 찜질방 할미랑 바다 갔던 거 기억나?" "저 장난감 할미가 사준 거 알지?" 하며 꼭 맘 떠난 남자 친구에게 매달리는 여자처럼 질척거렸다.  


 그러다 오늘 문득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선생의 외손자가 만 두 살 적에 선생에게 선물했던 민들레 꽃에 대해 추억하는 대목이었다. 그녀 역시 손자가 그의 볼과 머리털에 머물렀던 할미의 눈길을 기억할는지 궁금해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中>
 

 문장들을 따라가다 결국 펑펑 울어버렸다. 그렇지. 내 아이가 할미 사랑에 보답해야 할 이유는 없지. 내 딸이 나 대신 우리 엄마한테 효도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지.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엄마가 손녀에게 그런 바람을 가질 사람도 아닌데... 난 왜 그리 몸 달아했을까.

 나는 안다. 기억저장소에서 살아남지 못했더라도 ‘받은 사랑'들은 마음속 어느 틈새엔가 녹아있다가, 꼭 제 몫을 해낸다는 것을. 아마 지금도 샅샅이 뒤져보면 내가 기억하는 것들보다 몇 곱은 더 많은 '받은 사랑'들이 나의 빈틈을 가득 매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찬 바람을 맞아도 마음이 덜 시린 걸 거다.

 

 똑띠가 받았던 외할미의 사랑도 비록 선명하게 자국을 남기지는 못할지라도 언제가 제 몫을 해낼 것이다. 주저앉은 아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될 것이다. 내가 똑띠를 낳던 날, 울먹이며 커튼을 열어젖히던 일그러진 엄마의 얼굴이 오늘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처럼.


비정규 가족 탄생 D+189일. 오늘도 우리 가족은 모두 안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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