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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Oct 20. 2020

같이 걷는 일의 기쁨과 슬픔

어느 산책주의자의 소회

평소 즐겨하는 운동도 딱히 없고, 집에서는 현대인답게 거의 와식생활을 하지만 걷기는 좋아한다. 아이를 임신하고 열 달 내내 고약한 소화불량에 시달렸을 때도 뭐든 먹고 나면 무작정 걸으며 버텼다.(덕분에 양수가 시원하게 먼저 터지는 바람에 2주 일찍 엄마가 되었다) 동행을 마다하진 않지만 혼자 걷는 걸 더 좋아해서 그 시기 유난히 바빴던 남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도 했다.


나는 햇볕에 나가 걷는 일 만으로도 일상에서 겪는 웬만한 우울감은 다 털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괴로운 생각에 사로잡힌 채 집을 나섰다가도, 허락 없이 끼어드는 주변 풍경이나 소음들에 방해를 받다 보면 뭐가 괴로웠었는지 까먹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괴로운 생각에 집중해보려 해도, 발뒤꿈치를 딛고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 힘차게 땅을 밀어내다 보면 어느새 몸에 피가 돌고,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몸이 활기를 띠고 만다. 그 상태에서 다시 심각해지기란 매우 어색한 일이므로, 결국 걷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수밖에 없다. 못 믿겠다면 돌 무렵 막 두발로 서서 걷기 시작한 아이들을 보라. 본인의 팔다리가 의지대로 움직이는 경이로움을 계속 음미하고자 아무 데나 미친 듯이 뛰어다니지 않는가! 이것만 봐도 걷는 행위는 인간에게 원초적인 행복감을 주는 일임이 분명하다.


양평생활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점은 산책할 곳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 굳이 공들여 찾지 않아도 잠깐씩 마스크 벗고 걸을 수 있는 곳들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물론 모두가 같은 점을 축복으로 여기진 않는다. 산책주의자인 나와달리 엄마는 걷는 것을 싫어한다. 유혹적인 구경거리가 많은 여행지면 모를까, 똑같은 풍경을 보자고 밖에 나가 걷기'씩이나' 해야 하는 것이 불만인 눈치다. 그래서 암환자가 살기 위해서라도 걸어야지, 어쩜 그렇게 태평하게 불평인지 한 번씩 화가 치밀 때가 있다. 여하튼 우리 식구의 목표는 하루 두 번 엄마를 끌어내 산책하는 것이다.(아침 산책은 남동생 담당, 오후 산책은 내 몫) 아직 두 번 모두 성공한 날은 없지만 현관문을 나서기까지가 힘들지, 막상 나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는 것이 산책인 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들을 주절거리며 엄마랑 오붓이 걷는 산책길이 어느새 내 일상의 위안이 되었다. 혼자 걸을 때는 몰랐던, 같이 걷는 일의 기쁨을 새롭게 깨달았달까.


오후 네시의 양평 갈산공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산책코스다


혼자 걸을 때는 무심히 지나쳤을 법한 것들도 같이 걸으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된다. 우리 엄마는 걸어 다니는 식물도감이다. 뭐 그 나이대의 꽃박사 한두 분쯤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엄마는 정말 모르는 꽃이 없다. 매일 걷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던 닭장풀이나 쑥부쟁이 꽃들도 엄마가 이름을 일러주면 순식간에 내 길이 꽃길이 된다. 한 번은 예쁜 꽃이 있길래 물었더니 '며느리밑씻개'라는 개똥 같은 이름을 알려줘서 산책길 내내 죄책감조차 없는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에 분노하며 걸었던 적도 있다.


또 가끔은 말할 거리를 찾느라 눈에 보이는 것들을 괜스레 한 번씩 읊다가 의미 있는 풍경이 되기도 한다. 사실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사람들끼리 매번 같은 길을 걷다 보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럴 때면 괜히 "벼에 낟알 맺혔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추수가 다 끝났네. 아쉽다. 그치?"같은 시답잖은 소리들로 우리 사이의 공백을 메꾼다. 그렇게 다음은 또 무슨 얘기를 해볼까 찬찬히 주위를 살피다 보면 풍경에 의미가 생긴다. 찰나의 계절과 풍경에 민감해지는 일. 같이 걷는 일의 기쁨이다.


매일 같은 길을 같은 사람과 함께 걷는 일. 우리에게 허락된 감사한 축복.


마주 보고는 입이 잘 안 떨어지던 말들도 같이 걷다 보면 자연스레 나올 때가 있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아무래도 서로 말을 골라서 하게 되다 보니 완전히 솔직한 대화가 힘들다. 하고 싶은 말을 두고 밥 먹는 내내 싱거운 얘기들만 빙빙 돌다 끝나는 적도 많다. 그런데 같이 걷다 보면 아주 어렵고 무거운 얘기도 길가에 떨어진 밤송이처럼 툭 하고 떨어질 때가 있다. 듣는 사람도 조금 덜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된달까. 이유가 뭘까 늘 궁금했는데 얼마 전 엄기호 작가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읽고 무릎을 쳤다.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과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세계' 때문이다. 앉아서 이야기할 때 만들어지는 세계는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이 사이의 바깥은 무시된다.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의 바깥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드물다. 반면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은 다르다. 걸으며 이야기할 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바깥이라는 세계 '안'에 말을 나누는 이들의 '사이'가 들어가 있다.
바깥이 세계이기에 언제든 바깥에 눈을 돌리며 동시에 말을 나누는 이들 사이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바깥이 존재하며 머무르되 벗어날 수 있음, 이것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과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의 결정적 차이다. p256

결론적으로 걷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 걸기의 도구로 삼음으로써, 오가는 말과 생각들끼리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이야기에 지금 당장 반응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같이 걷는 일의 또 다른 기쁨이다.


쓰고 보니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산책에는 단점이 없다! 나로부터 벗어나 집 밖 풍경의 초대에 응해보시라. 가장 어려운 현관 문턱 넘기만 성공하면 낮이든 밤이든 자연의 환대를 받을 수 있다. 정말로 걷기 좋은 계절이다. 난 오늘도 엄마랑 길가에 핀 꽃들의 안부를 살피며 같이 걸을 것이다. 비정규 가족 탄생 D+93일. 오늘도 우리 가족은 모두 안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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