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편 되지 않는 브런치 글이 두 번이나 메인에 오르면서 홀로 심각한 한주를 보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인데 뭐랄까... 내 식구들과 주변인들이 돌려볼 수 있는 일기를 쓰고 싶어 시작한 일은 맞는데, 갑자기 그 외 몇만 명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늘 메인에는 들지 못하고 근처만 무심한 척 어슬렁 거리는 삶을 살아온 자로서,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메인의 위력에 경기가난 거다.
브런치와 daum에 소개된 두 편의 글. 유혹적인 해프닝이었다.
전원주택 생활에 대해 올린 첫 번째 글이 브런치 메인에 올랐을 때는 '이 글이 왜?! 조회수가 이렇게까지 나온다고? 살다 보니 이런 이벤트도 있네'하고 살짝 들뜬 채로 하루를 보낸 게 다였다. 그런데 공동육아에 대해 쓴 글이 daum에 노출된 것을 보고부터는 퍽 진지해졌다. 마음속에 들어오는 질문들도 뾰족해졌다.
'대체 무슨 알고리즘인지 연구해봐야겠어.'
'이 글보다 전에 쓴 글이 훨씬 좋구먼 왜 하필 이게 소개된 거지?'
'아니, 조회수가 3만을 넘는데 왜 구독자 수는 더디 늘어. 내 글이 재미가 없나?! 내가 제목으로 어그로 끈 거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꼬리를 붙들었다.
급기야 그날 저녁 밥상에서는 나만 심각한 채로 비정규 가족의 난상공론이 펼쳐졌다.
"다음 콘텐츠는 뭘로 할까? 나는 위로나 공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환상 같은 거 쓰고 싶은데. 아님 과연 고통은 나눌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암환자와 보호자 사이의 역학관계는 어때? 근데 이런 건 좀 너무 무겁지? 가벼운 걸로 할까? 우리 매주 한번 쓰레기 버리는 날 에피소드?"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남동생이 답했다.
"쯧쯧. 더 이상 취미가 아닌 일이 돼버렸군. 곧 파국이 일 것이야. 아무거나 써. 누나가 무슨 작가도 아니고."
남동생의 말이 정답이었다. 그렇다. 내가 무슨 책을 낼 것도 아니고, 일기 쓰던 거 브런치로 옮긴 게 전부인데 갑자기 자기 검열 스위치를 켜고 혼자 꼴값을 떨고 있었구나. 순간 멋쩍기도 했는데 덕분에 '왜 쓰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공개적인 곳에 쓰고자 하는 걸까.
모든 것에 우선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나를 위해서다. 나는 나의 해방을 위해 쓴다. 비록 내가 고통의 주체는 아니지만 고통을 겪는 이의 가장 곁에 서는일 역시 고통스럽다. 물론 우리 모두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이상한 레이스를 뛰고 있고, 그 결승점에 내 부모가 빨리 도착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왜 하필 우리에게'라는 꼬리표가 붙고 만다. 이 고통에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면 더 큰 공포와 절망이 찾아온다. 그런데 하루 24시간을 내내 공포 속에 있어서는 일상을 살아낼 수 없으니 쓰는 수밖에 없다. 쓰다 보면 신기하게도 내 새까만 마음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게 되고, 거시서 조금 더 쓰면 완전히 밖에서 나를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잠깐이라도 나로부터 분리됨을 느끼는 순간 후련해진다.
두 번째는 우리 가족 이야기를 전시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적힌 시들을 한 번씩 읽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이야기를 적어두면 누군가 우리를 위해 아주 잠깐이라도 기도해주지 않을까 해서. 그런 마음들이 어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엄마의 암세포도 조금 순해질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안부를 묻기 조심스러워하는 나의 주변인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은 것도 있다. 사실 병원에 가느라 자주 집을 비우는 것 말고는 우리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굴리라는 챗바퀴를 열심히 굴리다가 한 번씩 로또 맞는 날이면 치킨도 사 먹고 맥주도 마시고, 다시 군말 없이 챗바퀴를 굴리는 세속적인 날들일뿐이다. 내 글을 좋은 핑계 삼아 서로 한 번씩이라도 더 안부를 물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주제넘은 바람이지만 어떤 이유든 혹시 지금 마음이 어려운 분들이 계시다면 나의 기도도 보탠다. 얼마 전 신간 <복자에게>를 출간한 김금희 작가가 '작가의 말'에 적었던 문장을 선물하고 싶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