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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볼 브리야 Aug 03. 2022

종이책, 자전거, 장대비 등

#1 점심시간에 밥을 먹지 않고 밖에 나가 공원을 걸었다. 묵직하게 손에 가득 차는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읽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멕시코 처음 왔을 때 지냈던 방에서도 이런 나무가 보였다. 골고루 햇빛을 받을 수 있게끔 고르게 퍼진 잎사귀들이 가득한 나무.


가뭄으로 심하게 고생 중인 멕시코 북부와 다르게 수도인 멕시코시티는 거의 매일 저녁 장대비가 쏟아진다. 그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날씨가 이어진다. 한낮에도 그늘 안에 들어가면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초여름 혹은 봄의 한 가운데에서만 맡을 수 있는 싱그러운 향이 실려온다. 


책을 읽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고, 나뭇잎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누군가의 섬유유연제향도 같이 실려온 것을 눈치챘다. 옆 벤치에 앉은 아저씨한테서 나는 향이었다. 멕시코는 이런 기분 좋은 향이 주변에 가득하다. 공장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그 덥고 축축한 열기가 가득한 곳에서도 사람들은 작업복의 섬유유연제 향을 어떻게든 유지했다. 멕시코는 햇볕이 좋아서 그런가. 어떻게 그렇게 향을 가득 머금지. 혼자 별 관련 없는 추측을 하며 아저씨를 한 번 더 쳐다봤다. 청바지를 입고 짧게 잘 다듬은 콧수염을 멋드러지게 기른 멕시코 세뇨르다. 청바지가 주는 경쾌한 느낌은 다른 어떤 라틴 아메리카보다 멕시코에서 더 잘 살아난다. 도로 가운데서 보는 공사 인부들도 청바지를 입는다. 나는 그렇게 잘 다린 옷을 입고 밖에 나온 그가 집에서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를  생각한다.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린 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요가 선생님 중 한 명은 호흡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 천천히 여섯 번 나누어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었다.


#2 퇴근 전에 비가 오는 경우는 드물다. 오늘이 그랬다. 웅덩이 가득 빗물이 고여있는 길을 자전거로 지나가면 엉덩이는 물론 등허리까지 흙탕물이 튄다. 자전거를 두고 갈까, 잠깐 고민하다가 안장에서 내려 길 옆으로 걸었다. 도로의 차는 혹여 인도에 흙탕물이 튈까 속도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지나간다. 내심 고맙다.


비가 세차게 내린 뒤의 멕시코시티는 어딘가 차분하다. 자동차 매연이 걷힌 도시는 그 자체로 꽤 서정적이다. 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골목 골목을 누볐다. 오랜만에 와도 여전히 예쁜 동네다.


적당한 카페를 찾아 그곳에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동네 탐방이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니 배가 슬슬 고파왔다. 회사 밖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속이 꽉 막힌 것 같았는데 이렇게 쉽게 상태가 바뀐다. 집 앞 과일가게에서 망고 3개를 사서 돌아갔다. 달디단 망고는 육고기보다 소화하기 부담이 덜하다. 


오늘은 엄마 생일이었다. 투박한 선물이었지만 엄마는 매우 좋아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척 오빠가 결혼한 지 꽤 되었단 사실을 인지하며, 오빠는 애기 소식은 없냐고 물었다. 엄마는 “글쎄, 네 오빠는 그냥 흘러가는대로 두는 것 같아. 둘만 살아도 좋다고.”라고 말했다. 그렇구나, 엄마. 근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요새 지구온난화도 심해지고… 참 세상이 그렇잖아.


그런데 엄마는 다시 활짝 웃으며, 그래도 나는 딸내미 있으니까 좋은데. 이렇게 엄마 생일에 선물도 주고. 나는 가슴 한 쪽 어딘가가 허물어지는 느낌에 서둘러 전화를 마무리했다. 엄마는 항상 그래. 무조건적이다. 


부엌을 떠나기 싫어 초코 쿠키 반죽을 만들었다. 버터를 녹이고  설탕을 섞고, 코코아파우더의 고운 가루를 체에 걸러 준비했다. 휘휘 저어 랩을 씌운 뒤 냉동실에 넣었다. 두 시간 후에 단단해진 반죽을 오븐에 넣어 구우면 된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책에 코를 박고 읽었다. 


별안간 학생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험 결과에 어렴풋한 두려움은 느끼면서도 그 후에는 항상 도피성이 짙은 독서를 열정적으로 했다.


그런데 지금이 그때의 어리석은, 혹은 무모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얼마 전에는 요가 수업을 듣다가 물구나무 자세를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 눈물을 왈칵 쏟을 뻔 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실패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할 때가. 그럼 자세를 낮추고, 한껏 몰입해 책을 읽거나 주위의 좋아하는 것에 감각을 열어두고 관찰하며 기록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결심에서 나온 어제와 오늘의 기록을 여기 두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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