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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연 Aug 09. 2024

김치

쉰 김치를 씻어내다

* 글의 주인공은 저일 수도, 아닐 수도, 허상의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글마다 주인공은 바뀝니다.


*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


1. 김치를 씻는다.

2. 박박 씻는다.

3. 박박 씻었으면 더 야무지게 벅벅 씻는다.

4. 기름만 조금 두르고 통째로 익힌다.

5. 참기름과 깨를 뿌리고 챱챱!


냉장고에서 얼마 동안이나 묵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반 통도 한참 더 남은 김장 김치가 쉬어빠졌다. 익으니 배추에서 물이 나와 국물이 더 흥건해진 이 김치는 만나던 남자친구의 어머님이 손수 싸주셨다. 자취를 시작하고선 끼니 거르지 말라며 매번 밥을 해주시고, 반찬을 싸주셨던 오랜만에 보는 따뜻한 '어른'이다. 헤어지고 나니 그가 보고 싶은 마음보다 어머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는 건 좀 웃프다.


혼자 먹다 보니 김치를 더디게 먹은 것도 있지만 최근엔 일부러 안 꺼내 먹었다. 아니, 일부러 안 먹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쉽사리 손이 안 갔다. 근래 집에서 먹었던 반찬에 배추김치가 있었나? 무의식적으로 엄마가 싸준 다른 종류의 김치나 반찬을 꺼냈다. ‘김치를 먹는데도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 인생이 조금 다채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남자친구의 어머님과 가깝게 지냈던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님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과 모두 가깝게 지냈다. 가족을 마주한다는 게 조심스러웠던 나와는 달리 그는 본인의 가족에게 날 너무나 소개하고 싶어 했고 말 그대로 밥 몇 번 먹었을 뿐인데 어느 날 그의 가족의 또 다른 일원이 되어 있었다(?) 소소하고 큰 가족 행사들부터 가족 여행도 같이 가는 둥 어른 공포증이 없고, 붙임성도 나쁘지 않다 생각은 했지만 생각했던 나보다 난 유연하게 적응했다. (이유 중 하나, 생각해 보니 나눠본 적 없는 흔한 얘기이긴 한데 가족분들 모두 공통으로 MBTI가 E였을 거라 확신한다.) 외향적이고 정도 많으신 분들이라 마음을 금방 나눌 수 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가까워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이후 그와 나는 서로 잘 지내, 안녕-하며 우습게 몇 마디의 대화로 그동안의 시간을 정리했으나 그와 헤어지고 나니 또 다른 헤어짐이 남아있었다.


“다시는 여자 친구 데려오지 말라고 하시더라” 어머님, 그의 가족들과 헤어짐이었다. 어머님도 역시나 헤어짐의 시간이 필요하셨던 거다.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드리고, 다음 날 받았던 답장엔 ‘아프지 말고, 엄마가 기도할게’라는 문장으로 끝이 났다. 그 문장은 한동안 밤낮없이 내 마음속을 이리저리 정처 없이 거닐었다.


징크스처럼 연말이 되면 꼭 아픈 내 몸뚱이 지난해엔 어쩐 일인지 무사히 지나갔고 다시 또 연말이 다가오자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징크스는 걱정에 답하듯 여지없이 찾아왔다. 며칠을 땀 뻘뻘 흘리며 앓은 뒤, 털고 일어나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대청소와 김치 정리. 묵혔던 김치를 꺼내 국물 한 방물 없이 모조리 씻고,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 대로 양념 벗은 김치를 만들었다. 입맛 없을 때나 혹은 김치가 너무 쉬었을 때 엄마가 이따금 만들어주던 음식이다. 박박- 벅벅- 깨끗하게 씻은 김치는 양념이라곤 하나 없고, 국물이라고는 하나 없는 아주 말끔해진 모양새의 백김치와는 또 다른 김치다.


한국인이라면 밥을 먹을 때 찾게 되는 익숙한 감칠맛의 빨간 양념이 사라졌다는 게 어쩐지 낯설고 아쉽긴 하지만 본연에 충실한 맛, 자극 없이 느껴지는 이 김치 맛이 오히려 썩 나쁘지 않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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