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QL 아니에요. 회계사 자격증 아니에요.
SQL, 회계사 자격증, 미국 회계사 자격증, MBA 학위 등. 재경직군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무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앞서 나열한 이러한 능력들이 있으면 회사와 직군을 떠나서 어디서나 환영받는 인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모두가 생각하는 조금 ‘당연한’ 미덕을 떠나서 숫자쟁이가 갖추어야 할 ‘의외의’ 미덕을 말해보고자 한다.
신입이나 직무이동을 원하는 사람에게 위와 같은 미덕은 너무 먼 이야기니까. 그런 것들이 없어도 충분히 업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또 혹시나 해당 팀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싶을 때 이런 점을 내세우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입으로 돌아가서 ‘내가 왜 뽑혔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하나다.
그만둘 것 같지 않아서
재경직군은 퇴사율이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덕 중에 미덕은 잘 견딜 줄 아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기업에서 신입을 키우는 데에 교육비 등을 포함하여 1년에 1억이 넘게 든다고 한다.(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기회비용을 전부 따져보면 그럴 수도?) 특히 재경직군의 업무는 업무경력과 업무처리능력이 정비례하는 특성이 강해서 중간에 버티지 못하면 회사 입장에서는 실패한 투자가 되어버린다. 나는 사업에 대한 이해, 업무에 대한 이해, 전문분야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여 신입이 제대로 된 1인의 업무를 하는 데에 3년 정도가 걸린다고 본다. BEP를 달성하려면 그만두지 않고 6년 이상 일할 수 있는 신입을 뽑아야 한다. 경력은 이 기간이 1년 반 정도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위에서 설명한 재경러의 특성을 바탕으로 ‘의외의’ 재경직 3대 미덕에 대해 알아보자.
<첫 번째 미덕 : 강한 맷집>
맷집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것보다 알맞은 비유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맷집이라는 건 업무적 수용능력을 뜻한다. 같은 자료를 가지고 수십 번을 다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 상사가 보고 주제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주제마다 수정의 수정을 거친다. 수십 번을 행열을 바꾸고, PPT 각 세부 요소의 위치를 조정하고, 중요한 부분을 위주로 재분석을 하다 보면 숫자는 틀리기 일쑤다. 숫자 쟁이들이 숫자를 틀린다는 건 이미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 서늘하게 팀장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의 위기를 참고 넘기면 1차 퇴사는 이미 극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두 번째 미덕 : ‘국영수 위주로 공부했어요’ 탄탄한 기본기>
재경 일은 사실 다이내믹하다. 어쩜 이렇게 매일 다른 이슈들이 발생하는지 심심하지가 않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이 타성이 있지 않은가. 비슷한 케이스가 몇 개만 있어도 나도 모르게 뇌피셜을 남발하고 만다.
“이렇게 해도 될걸요?”
퇴사의 지름길이다. 재경의 기본은 돌다리를 두드리다 못해 돌다리 위에 콘크리트를 깔아서 단 하나의 논쟁거리도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자꾸만 뇌피셜로 일하다 보면 상상으로 일하는 재경인이 된다. 그리고 동료들은 이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너무 자주 지적을 당하면 일이 재미없어지는 게 당연하다. 동료가 잘 가꾸어 놓은 자료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머리가 깨끗한 나를 위해서라도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기본서와 지침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마지막 미덕 : 체력>
사람은 같은 일을 매달 하게 되면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온다. 특히 매달 하는 일이 하루에 12시간을 넘기는 일이라면 누구나 체력의 한계를 느낄 것이다. 우리는 개발자가 아니라서 한 프로젝트를 마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른 일을 시작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재경직군 직원들은 팀에 관계없이 월초에서 중반까지가 매우 바쁘다. 오죽하면 ‘회사를 다니고 싶은 마음은 15일 전후로 나뉜다’라는 말이 있을까. 회계팀, 사업부의 경우 결산 / IR팀과 연결 회계팀은 공시 / 사업부는 경영실적보고 / 세무팀의 경우 분기별 각종 세액 신고 등을 버텨내려면 체력이 필수다.
나는 친구들로 가득한 고등학교도 3학년까지가 한계이기 때문에 고등학교도 3년만 하는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하물며 고등학생보다 의지도 한참이나 약한 직장인은 3년을 버티기 쉽지 않다. 2년만 되어도 이른바 ‘탈재경’을 꿈꾼다. 번아웃은 금방 온다. 한 달에 15일 미만으로 쉴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있는 만큼, 쉴 때는 눈치 안 보고 푹 쉰 다음 업무에 복귀하는 것이 팀을 위하는 길이다. 저번에도 언급했지만 이미 많은 선배들이 거북목과 목디스크,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체력관리에 몸 관리가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