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쟁이들의 연중 최대 행사
재경직군의 가장 큰 연중행사는 단연 사업계획 수립이다. 사업계획은 수립 기간으로 보나, 인적자원투입 규모로 보나, 임팩트로 보나 대적할 이벤트가 없다. 사업계획이 얼마나 큰 일이냐 하면 이 기간에는 사업계획만을 전담하는 조직이 생기고, 각 조직에서 가장 경력이 많은 최고참들이 모여 24시간 사내에서 회의를 하고 대기를 한다. 모든 대기업은 하반기에 차년도 사업계획 수립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사업계획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큰 행사가 될까?
사업계획이란 한 회사가 차년도의 사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예측 및 계획을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량적으로 수립하는 과정을 뜻한다. 전사의 일이기 때문에 이는 전 직군의 일이 된다. 이 과정은 보통 내년도 시장분석부터 시작한다. 마케팅, 영업, 개발에서는 내년의 시장 상황을 예측하고 개발 로드맵을 그린다. 영업은 개발과 맞추어 매출을 일으키기 위해 전략을 세운다. 이 작업과 동시에 경제분석을 바탕으로 사업계획을 주관하는 부서에서는 내년 경제시장의 전반적 물가상승률 예측 및 목표치를 제시하는 사업계획 수립 가이드를 만든다.
각 연구소와 사업부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인원 계획, 개발계획, 마케팅 계획, 재고 계획, 생산계획, 품질계획, 투자계획 등 한해 세울 수 있는 모든 정량지표를 수립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재경직군 사람들은 할 일이 매우 많은데, 사업계획 시즌은 사실 죽음의 시즌으로 봐도 무방하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소속 조직을 대표하는 것은 무조건 실적이다. 실적이라는 말이 매우 넓게 쓰이지만, 재경에서는 무조건 손익이다.
손익은 따로 덜렁 손익으로 존재할 수가 없고, 손익계산서 상의 피라미드 꼭대기인 ‘매출’이 있어야 가능하다. 매출 계획은 영업에서 세우지만 재경에서 매출 계획을 검토해야 한다. 재고, 생산량에 따라 월별 손익이 달라지기 때문에 월별 계획을 세우려면 물류, 생산팀에서 세우는 재고 및 생산계획도 알아야 한다. 개발이나 생산에서 사용하는 각종 ‘비용’들 또한 매출원가 및 판관비가 되기 때문에 사실상 재경에서는 조직 전체의 매출부터 비용, 재고 계획까지 모두 보아야 결괏값인 ‘손익’을 산출할 수가 있다. 참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사를 들어오기 전에는 회사를 들어가면 각자 자기 자리에서만 잘하고 타 부문 일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재경 일은 물류부터 제품 구조, 부품까지 전부 알고 있어야 한다.
전사가 움직이는 일이니 한두 달 안에 끝나지 않는다. 몇 개월에 걸쳐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검토하고 또 검토한다. 사업계획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한 사업부의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뿐 아니라, 사업계획은 보통 연말 실적을 발표함과 동시에 컨퍼런스콜 등을 통해 투자자와 주주에게 투자계획, 시장 예상 등을 발표하기 때문에 회사의 주가를 휘청이게 만들 수도 있다.
사업계획 시즌이 힘든 이유는 사업계획을 수립하면서 동시에 여러 부문 및 부서와 합을 맞춰야 한다는 점, 이런 것까지 계획을 짜나 싶을 정도의 세세함, 목표 설정에 대한 눈치싸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하면서 동시에 원래 하던 업무를 전부 잘 해내야 한다는 점이 있겠다. 당연히 근무시간은 매일이 초과다.
하반기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차원에서 사업계획에 관한 글을 써보았다.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만 써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사업계획은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편안해지지 않는다. 다른 회사 사람들도 사업계획만 짜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들 한다. 이 괴로움에 대해서는 여름휴가를 갔다 온 후에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