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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싱더바운더리 Aug 15. 2023

패션 우울증 대가리 깨버리는 만화

혐규만화 리뷰

최근 들어 '패션 우울증'이 많이 보이곤 한다. 패션 우울증이란 말 그대로 우울증이 아닌데도 우울증인 '척'하는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방패로 삼아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고 문제를 회피하는 데에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은 이런 패션 우울증 환자들의 대가리를 깨버리는 만화를 하나 소개해보겠다. 인스타 페이스북 등에서 연재 중인 만화 '혐규 만화'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혐규 만화하면 떠오르는 대표작

앞서 말했듯 혐규만화는 대가리를 깨버리는 데에 특화된 만화지, 딱히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만화가 아니다. 한 번 얻어 티지고 나서 그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자신의 몫. 따라서 자신이 앓아누운 후 다시 일어날 용기가 없다면, 나는 이 만화를 추천하지 않는다. 


혐규가 인간을 건드는 방식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자기애'를 마치 바늘처럼 터트리는 식이다. '패션 우울증'이란 역설적으로 자기애로부터 형성된다. 자신이 상처받지 않게끔 아픔, 애정결핍, 우울 같은 것들로 둘둘 싸매는 것이다. 혐규는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대신 초크 슬램을 시전 해버린 후, 뻗어버린 상대를 비아냥대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위의 그림처럼 상처로 자신을 치장한 이들을 위로해 주는 척하다가 한 번 꼬아서 엿을 맥이는 방식이다. '다들 날 싫어해.'라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그저 위로받기 위해서 뱉은 말이란 사실을 말이다. 


우울, 낮은 자존감 같은 것들을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활용하는 것을 질타한다는 점에서 혐규만화는 조던 피터슨의 지론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던 피터슨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는 사람들이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도록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는 반면 혐규만화는 그저 질타만 하고 끝낸다.


이에 대해 이 만화에서 남는 것은 조롱과 비난뿐이 아니지 않냐는 식의 비판여론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이 만화는 어떠한 측면에선 그저  '불행 포르노'적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예술 작품이 명확한 답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혐규 만화가 주는 강렬한 충격으로 인해 스스로 답을 깨닫고 변화하는 것이 어떤 면에선 더욱 건전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실존주의를 뒤엎는 내 실존주의"라는 저스디스의 가사처럼 혐규만화는 "염세주의를 뒤엎는 염세주의"라고 표현하고 싶다. 인사이드의 카툰 연재 갤러리를 필두로 한 '앰생 도살기'적 작품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혐규만화는 병균에 가깝다. 사람을 앓아눕게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면역력을 높여주기도 한다. 사람은 을 변화시키는 건 대개 위로가 아닌 큰 충격이기에 나는 변화하고 자신을 낱낱이 분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만화를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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