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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다 Jan 08. 2023

숲속 도서관의 시간은 가고

재취업의 이력서

4N km/h로 가고 있는 사람. 지금 기록해두고 싶은 것을 씁니다.


하루 한 끼 정도는 먹고 싶은 것을 공들여서 해 먹고, 가장 볕이 좋은 시간을 골라 산책할 수 있다. 뻐근함이 풀릴 때까지 규칙적으로 스트레칭을 한다. 어디든 정리할 곳이 보이면 바로 청소를 하고 커피도 천천히 차우림도 천천히... 그래서 좋아하는 계피차도 자주 끓여 먹었고 귀찮아서 하지 않던 모과차, 생강차도 담았다. 수세미도 코바늘로 떴다. 유튜브를 켜놓고 따라 하며 스스로 머리도 잘라보았다.

우리 동네에 봄이면 향기로 가득한 아카시아 터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걷고 싶은 산책로와 둘레길이 많고 숲속도서관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날 좋은 날엔 햇살에 등을 따땃하게 지지며 공원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렇게... 시간이 없을 땐 만사 피곤하다며 돈으로 해결하던 것들을 거의 다 해보았다. 한 마디로 시간이 충분하다는 건 무얼 하든 지치지 않고, 볶아치지 않고, 공들여 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도 그렇게 느긋한 사람이었다.

회사를 다닐 땐,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바로 요가 매트를 깔고 대자로 누워 한참을 있었다. 충전하듯이. 얼굴부터 몸은 늘 조금씩 부어있는 느낌이고 그 찌뿌둥함이 주말 이틀 쉰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주중에 눈에 띠는 해야 할 잡일은 일단 다 주말을 향해 쌓아 놓았고 막상 주말이 되어 그것을 다 해치울 리는 드문 편이었다. 보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보는 일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시간이 충분해지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보고 사니 얼굴에 누런 붓기가 다 사라졌다.


이제 다시 또 그렇게 될까. 2년 만의 출근이다. 사실 공시생활과 기타 자격증 시험으로 가득했던 전직 준비의 2년이었기에 완벽한 쉼의 계절은 못되었다. '행복'은 시간이 많았던 백수 시절에 더 많이 분포해 있고 '다행'은 일할 수 있는 상황에서 꺼내어 쓰는 위로의 말인 것 같다.


연말연초 2주 동안 5곳에 지원했고 4곳에서 면접 연락이 왔고 3곳에서 최합 통보를 들었다.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생각만 몇 달. 맞는지 아닌지는 결국 겪어봐야 알 수 있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냥 최대한 선택의 시간을 미루고 싶었다. 급여가 매우 하찮지만 민간이 아닌 공공기관에서 시작하고 싶고, 이왕이면 집단상담프로그램 진행 역량을 함께 키울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는 등 시간이 흐르며 몇 가지 기준이 세워졌고 소문대로 연말에 공고가 한꺼번에 올라와 그동안 하지 않던 지원을 몰아서 하게 되었다.


긴장했던 면접의 첫 경험은 고용센터에서 다대다로 치러졌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총 4곳의 면접을 보는 동안 어느덧 나는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 공격도 즐길만하고 티키타카가 된다고 느낄 땐 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처음 입직하는 분야의 고수들이 면접관으로 주욱 앉아있는 그 시간을 커피 한잔 들고 기다릴 정도였다. 4곳의 채용분야는 공통이지만 센터 별로 직무는 다 달랐기에 그 점도 운이 좋았다. 정신없이 보냈다. 시기가 겹치니 이미 출근하겠다고 한 곳에 임용취소서를 내야 했고 다른 한 곳은 죄송하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에 아쉬움도 남지만 아직 가지 않은 길 중 어느 쪽이 더 나을지를 지금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최종합격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40대 후반에 자격증 한 장 달랑 믿고 운을 띠어보는 낯선 입직 분야에 면접의 기회라도 주어지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다. 모든 게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진 것 같지만 "계획된 우연"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나이가 많은 나의 이력서는 첨삭 중에 많은 부분을 삭한 이력서였다. 바리스타 자격증, 미술실기교사 자격증 등 관련 직무와 무관해 보이는 자격증은 다 지웠고 교사 / 강사 관련 경력도 올리지 않았다.(사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의 일인데...) 시도했던 경험들은 다 넣을 수가 없어서 경력 위주로 적었다. 

웃긴 건, 자소서 어디에도 '추진력' '기획력'이라는 단어를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대표님은 나의 선발 이유로 그  두 가지를 꼽았다. 경험을 어떤 단어로 응축해야 할지 나조차도 모르는데.


열심히 살아온 흔적을 보유한 채 솔직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당당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그동안 몸소 해왔던 일에 대한 이력을 담은 이력서와 자소서를 거짓 없이 썼고, 그걸 다 읽고서 나를 면접장에 불렀다면 시간과 인력이 남아돌아서 수다나 한판 떨고 싶은 의도가 아니고서야 뭔가 확인하고 싶은 면을 내가 갖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동안 해왔던 일에 대한 전문성을 새로운 일로 어떻게 연결시킬지를 궁금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인생2모작은 옛말. 인생N모작의 시대. 40대 후반에 두 번째의 직업을 시작한다. 

해오던 일이 싫어져서 내가 떠나는 게 아니라 그 직종이 더 이상 나를 받아주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니 타의성이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 읽은 "누가 내 치즈를····"의 내용처럼, 때가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미련에 붙들려 계속 빈 창고에만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이미 나는 충분히 앉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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