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얼굴이 하얀 사람을 사랑했다. 그 하얀 얼굴을 언제 한번 다시 보아야만 했다.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만나야 했던 것이다.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고,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우리 추억은 다르게 적혔던 건가. 대답을 듣지 못하면 앞으로도 그 사람 생각이 묵직하게 남아 다음 장으로 쉬이 넘어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여기가 끝장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 하얀 얼굴을 생각하면 내 마음 눈밭같이 푹푹 파이는 기분이라 앞으로 단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상처로 엉겨 붙어 응고된 기억, 얼어붙은 추억을 녹여주어 더는 가두지 않아야만 남은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을 위해서, 또 앞으로를 위해서 과거의 그 사람을 꼭 만나야만 했다.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좀처럼 낼 수 없을 만한 용기를 내어 어렵게 연락처를 구해 몇 년 만에 연락해 보았다. 거두절미하고 만나자고 했는데, 얼굴이 하얀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헤어진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옛 연인을 만나는 것을 저어하는 듯하였으나 아닌 것도 같았다. 예전처럼 혹은 언제나처럼 나를 헷갈리게 하였다. 다만 그 사람은 며칠 뒤 무슨 까닭에선지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 얘기를 꺼내었다. 아사코를 다시 만났을 때처럼 너와 나의 인연이 퇴색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렇게 들렸다. 왠지 대답이 되었다. 아사코 얘기를 듣고 나니 나는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즈음 ‘문라이트’라는 영화가 개봉하였다. 주인공은 얼굴이 까만 사람으로 이름도 블랙이라 하였다. 유년기 리틀과 청년기 샤이런을 지나 현재의 블랙으로 이어지는 구성에서 한때 좋아했던 케빈을 만난 뒤 영화는 끝난다. 케빈은 리틀과 샤이런 시절을, 어쩌면 블랙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사람이었다. 블랙이 케빈을 찾아갔던 이유 또한 나와 같았을 거라 생각한다. 케빈에게서 꼭 듣고 싶은 대답이 있었을 것이다. 케빈 덕택에 더는 우습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잘 살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블랙이 되기까지의 지난 날들이 있었다. 겉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블랙의 과거 연약한 지반을 다져준 사람. 그토록 안쓰러워 초라하기까지 했던 그 어린 시절에 나를 안쓰럽게 여겨준 단 한 사람은 나에게 얼마큼 진심이었나. 아니, 진심으로 안쓰럽게 여겨주기는 했던가. 그 지반 없이는 지금 이루고 있는 이 삶에도 지진이 날 것만 같은데 말이다.
“Why did you call me?"
블랙은 고작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아주 먼 길을 찾아 갔다. 아마 이 물음에 케빈과 블랙의 관계, 블랙의 애처로운 과거, 그 밖의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을 테다. 케빈을 생각할 때 블랙의 마음을 까맣게 태우던 기억. 케빈의 전화를 받고서 물음표를 안고 잠든 까만 밤들. 상처인지 사랑인지 그 사이 어디쯤인지 깜깜한 지표. 당신도 그 시절 나를 진심으로 애틋하게 여겨주었길. 그 대답을 들어야만 너무 허약해서 밉기까지 했던 과거의 나와 화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케빈은 시시콜콜 대답하지 않았지만, 블랙의 내면에서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대답을 들으러 갔으나 질문하는 순간 케빈의 눈에 이미 대답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사코 얘기를 마지막으로 더는 생각나지 않았던 그 사람이 그 후로도 한 차례 연락을 또 주었다. 만날 생각은 없었다. 만날 이유가 이젠 없었다. 얼굴이 하얀 그 사람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사코를 세 번째 만났을 때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뻔하였다고 ‘인연’에 씌어있다. 우리는 피천득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뻔한 만남을 구태여 만들어내지 않았다. 다행한 일이었다. 아사코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랜 정지된 화면 속 하얀 얼굴의 사람은 지나간 화면으로 그렇게 두기로 하였다. 또한 남은 삶에서 추가적인 리와인드는 없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