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가을학기 때 제임스 조이스로 박사 학위를 받은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타 학교 출신이신데 우리학교로 출강을 오시는 분으로 그해 가을 우리학교에서 '더블린 사람들'을 강의하고 계셨다. 어느 날 과 사무실에서 우연히 뵈었는데 중저음에 탁한 톤으로 나한테 더블린 사람들을 읽어 보았느냐 물으시더니 제임스 조이스와 더블린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 놓으셨다. 작품 속에 묘사된 더블린의 도로 구석구석, 더블린 공기의 느낌과 도시의 분위기가 100여년이 지난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다며 더블린은 정말 매력적인 곳이라는 말씀을 거듭 하셨다. 더블린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 눈빛이 너무나 총명해 이미 그 안에 더블린이 선명히 들어있는 듯했다. 당시 나도 돌아오는 겨울방학에 더블린을 여행할 마음이 있었으므로 상당히 흥미롭게 들었는데,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만으로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경외심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교수님은 더블린에 얼마나 계셨어요?"
이어지는 선생님의 대답에 나는 적이 당황하였다.
“어, 아직 안 가봤는데, 우리 나중에 언제 한번 꼭 더블린에 가 보자.”
?
산에 대해 얘기하려면 산을 오르고 내려와서 산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얘기할 수 있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교수님 대답이 오래도록 잠자고 있던 그 글귀를 깨웠다. 과연 그 말이 맞다면 더블린에 대해 얘기할 자격은 언제쯤 갖추게 되는 것일까.
그해 겨울 더블린은 못 가고 런던에서 방학이 끝날 때까지 머물렀다. 런던의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더 이상 튜브맵을 보지 않고도 환승을 할 수 있고, 웬만큼 유명한 동네는 이름만 들어도 위치와 풍경을 떠올릴 수 있게 된 즈음 런던에서 수 년 이상 생활한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여행객 가운데는 내가 런던에 대해 잘 말할 수 있는 편이지 않을까 스스로 자부하며 귀국하였다. 런던을 추억하며 한국에서의 일상을 살던 어느 날, 대형서점에 들러 여행 코너에서 런던에 관한 책을 뒤적이게 되었는데 몇 권을 살펴보고 나서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내가 런던에 대해 단 한 줄도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더블린에 대해 얘기하려면 더블린을 다녀오고 나서 더블린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다음에야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지도 모른다.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더블린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 놓던 그 교수님의 눈빛을 떠올리면 더블린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더라도 더블린에 대해 말할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직 안 가봤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당황하였지만 그 교수님이 우습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런던에 다녀와 런던에 대한 책들을 접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된 것이다. 더블린에서 수 일, 수개월, 수 년, 수십 년을 살게 된들 그 어느 때 더블린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을 자격이 갖추어 지는 것은 아니다. 더블린에서 태어나 평생을 더블린에서 살다 더블린에 묻혀도 더블린에 대해 단 한 줄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블린에 대해 언제 어떻게 말하더라도 똑같은 것이다. 다만 우리가 더블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내가 감히 더블린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의심하는 자기 검열, 네가 뭔데 더블린에 대해 이야기하느냐 업신여기는 타인의 멸시, 그로 인해 위축된 자신인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잘 아는 대상에 대해 아무렇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싶다. 제임스 조이스를 너무나 사랑하여 더블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빛을 빛내던 교수님처럼, 그리하여 더블린에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아도 더블린에 다녀온 웬만한 사람들보다 더블린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