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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병원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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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Z May 20. 2020

NPO

엔피오: 의학적 검사를 실시하기 전에 환자들로 하여금 일정 시간 동안 음식물의 섭취를 금하는 것(표준국어 대사전 우리말 샘)


정말 한참 지난 일이었다. 전공의 1년 차. 일흔이 다 되신 환자는 일주일 전에 폐암 진단을 받고 입원을 했다. 곧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환자는 본인의 병을 대체 왜 수술받아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고 했다. 한참을 폐암에 관해서 설명을 드려도 병원 살이가  불편해서 집에 가겠다는 말만을 되풀이 하고, 자식들을 봐서 수술은 받아주겠다고 말하시던 분들이었다.


수술 전날 동의서를 받았다. 12시가 거의 다 된 시간아는 게 없는 1년 차여서 그랬는지 거의 한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이야기를  드렸다. 병의 예후, 통증의 정도, 주의해야 할 사항 등. 환자와 보호자들 오히려 모두 피곤해 보이는 나를 걱정했다.

“알아 들었으니까. 빨리 주무세요. 내일 수술하셔야 하잖아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들이 동의서에 사인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실 전공의 1년 차가 수술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수술 보조의 보조와 피부 봉합뿐인데. 전공의 1년 차도 의사로 존중해 주시는 그들이 고마웠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는 말을 하고 한마디를 더했다.

“저희가 드셔도 된다고 할 때까지 음식 드리지 마세요. 물도요. 폐로 넘어가면 안 되니까요.”


나는 새벽녘에 잠이 들었고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평온했다. 폐암 덩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진행도 많이 되지 않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예쁘게 피부를 봉합해 드렸다. 중환자실에서 하루가 지난 후 환자는 중환자실로 올라가게 되었다.  밤 9시가 넘어 환자가 올라갔다는 연락이 왔다. 환자는 2인실에 있었다. 아파하기는 하셨지만 정말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진통제 드릴 테니 주무시라고 말씀드리고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고 당직실로 들어왔다. 할머님이 쭈뼛거리며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더니 다시 아니라고 말을 삼키셨다.


'그날' 새벽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늘 그렇듯 새벽 당직실 전화가 요란히 울렸다. 전화 넘어 목소리의 대사는 간단했다.


“오늘 환자 나빠요. 빨리 오세요. 지금.”


슬리퍼만 신고 병동으로 뛰어갔다. 오늘 환자는 바로 오늘 올라온 그 환자였다. 산소 포화도는 70%밖에 되지 않았고 혈압도 형편없었다. 불과 두세 시간 전 멀쩡하던 분이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할머니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떨고 있었다. 지체할 수 없었다. 곧 산소 포화도 저하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먼저 기도 삽관을 해야 했다. 몇 번 해보지 못한 기도삽관을 했다. 다행히 잘 들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산소를 짜주고 나니. 삽관된 튜부에서 주황빛을 띤 노란색의 끈끈한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콸콸 뿜어져 나왔다. "기도 삽관이 잘못돼서 혹시 관이 식도로 들어간 것 아닌가요?"라는 말에 청진을 해보았다. 분명 기도로 들어간 것이 맞았다. 삽관 튜부를 통해 수십 번 노란 액체를 뽑아냈다. 노란 액체는 줄지 않고 계속 나왔다. 그러는 동안 산소포화도가 조금씩 올라갔고 노란 액체 사이에 흰 조각의 불순물도 섞여 나왔고, 초록색 오이 조각 같은 것도 함께 나왔다.


분명 NPO였는데, 혹시 음식을 드셨냐고 할머님께 물었다. 할머니는 벌벌 떨며 "네"라고 대답하셨다. 수술받고 아무것도 못 드시는 힘든 할아버지가 너무나 안쓰러워서 할머니는 환자가 중환자실 계시는 동안 늙은 호박과 찹쌀로 직접 호박죽을 끓이셨고 물을 잘못 넘기면 기도로 넘어간다는 말을 듣고 오이를 잘라 오셨다고 했다. '그날' 밤. 내가 다녀간 후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워 하얀 잣을 듬뿍 뿌린 호박죽 한 그릇을 가득 할아버지 입에 넣어 드시게 했고, 물은 위험하니 대신 오이를 드렸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의료진 모두는 정말 그 순간 '아!' 하는 낮은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중환자실 자리를 만들어 환자를 모시고 내려갔다. 나는 기관지 내시경을 가져다 폐 내부를 보았다. 기관을 지나 폐 안쪽에 아직도 노란 호박죽이 보였고, 군데군데 녹새의 오이 껍질도 있었다. 밤새 씻어내고 가래를 배출시키고 환자 옆에 붙어 아침을 맞았다. 중환자 실 밖에 놀란 보호자가 도착했고, 나는 폐로 음식이 넘어갔다고만 말씀드렸다. 보호자는 NPO가 아녔냐고 물었고 나는 맞다는 대답만 해 드렸다. 아침이 됐다. 환자는 깨어났지만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교수님께 한참을 혼났다. 왜 환자가 그 시간에 NPO가 풀렸는지에 대하여.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이미 교수님도 상황은 알고 계셨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담당의사가 나라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날 분명히 NPO였는데 왜 그러셨냐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그저 할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워 그러셨다고 했다. 혹시 몰라 그날 밤 호박죽은 줘도 되지 않냐고 물어보려다가 안된다고 할까 봐 몰래 주셨다고 하셨다. 환자는 아주 한참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더 한참을 지나서야 병동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기관지 내시경을 통해 보았던 잘라진 오이 조각과 호박죽 때문에 노랗게 변한 폐 내부가 나오는 꿈을 꾼다. 그리고 호박죽을 보면 후회를 바탕으로 한 헛된 가정이 머릿속을 맴돈다. 만약 내가 한 번만 더 환자에게 갔었더라면, 무엇인가 물어보려는 할머니께 왜 그러시냐고 다시 물어봤더라면, 동의서 받을 때 내가 잔소리를 더 했더라면, 할아버지를 안쓰러워했던 할머니의 마음을 내가 눈치챘더라면.  


호박죽은  내겐 가장 아픈 병원의 음식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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