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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전초이 Jul 13. 2020

허수아비 놀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오랜 노동과 때론 따분한(?) 전공의 생활.


가끔은 즐거운 놀이 시간도 있다.



이번에 들려줄 이야기는 바로..!


‘허수아비 놀이’ 이야기.






두둥



허수아비 놀이가 뭐에요?



이제부터 스타트.



 허수아비.

친근하고 정겨우며 추억돋는 내음 나는 단어.


고향의 냄새가 나는 듯 향긋하다.

(그렇다. 나도 안다. 아주아주 오바다.)


출처는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허수아비'의 뜻




2.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으잉??


하지만 그것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년 여 전.


나는 훌륭하고 멋진 외과의사가 되기 위해

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었다.


의전원을 준비하며

스스로 동기부여를 위해 가끔 봤던

하얀거탑의 장준혁.


말이 필요없는 멋짐과 카리스마 있는

외과의사의 대명사이다.


매스를 들고

어떠한 응급상황에서도


사자의 심장과 같은 용기

매의 눈과 같은 예리한 눈

섬세한 손재주를 가지고


생명을 살리는 멋진 외과의사..!!


이런 부푼 꿈을 가지고 시작했었다.





하.지.만.


외과 1년차가 된 나의 현실은


아이엠 그라운드 허수아비 놀이.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디인가..? (출처 : 데일리안)


허수아비 놀이.






허수아비 놀이의  한가지 사례를 제시해본다.




내가 담당하는 환자가

수술 후 5일 째인데 아직도 발열과 복통을 호소하고 있다.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서 CT 검사를 진행한다.


검사 처방을 한 후

컴퓨터 상으로 '전산 푸시'를 한다.

그리고 나서

CT 검사실에 '전화로 푸시'를 한다.

또 그리고 나서

CT 검사실에 '직접 가서 푸시'를 한다.


"안녕하세요, 외과 전공의 서전초이입니다.

저희 환자분이 이러이러해서 CT를 오늘 꼭 찍어야 하는데요

진짜 무조건 오늘 꼭 꼭 꼭 찍어야 하는 분입니다.

진짜 제발 부탁해요. 꼭이요. 꼭!"


겨우겨우 조르고 졸라 CT를 찍는다.





<외과 전공의 1년차의 괴로운 일상이 궁금하다면>


https://blog.naver.com/bentodol/221552171792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허수아비 놀이가 시작된다.


CT를 찍었으면

우리 외과의사도 어느정도 판독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영상만 전문적으로 보는

영상의학과 교수님께 정식 판독 소견을 확인해야 한다.


영상 판독실로 달려간다.


그리고 복부영상 판독을 해주시는 교수님을 찾는다.


너무나 당연히도

교수님께서는 무언가를 하고 계신다.


담당 전공의와 밀려 있는 CT 검사 판독을 하고 있거나

홀로 판독을 하고 계시거나

..

병원에서 바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


이 와중에 불쑥 찾아가서

무조건 다짜고짜


"교수님! 이거 판독해주세요!"

라고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지나가던 강아지도 알만한 사실.


그래서 허수아비 작전에 돌입한다.




교수님 뒤에 가서 서있는다.



1분..2분....

5분.......



그냥 서 있는다.


허...허수아비 처럼.




하긴, 윗년차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은

더 가관이다.



"야, 판독실 가서 판독 해줄 때까지 드러누워 있어."


(흠, 서있는 것보다 누워 있으면 편하기라도 하겠네.)




운이 좋으면

교수님이 매번 허수아비 놀이를 하러 오는 나를

빨리 발견하고 판독을 해주시기도 한다.




때로는 그저 서서 하염없이

허수아비 놀이를 하곤 한다.



어떨 때는 요령이 생겨서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게 하거나


"에헴 에헴.." 하며 헛기침을 해보거나


병동에서 콜이 와서 전화벨이 울리길 기도하기도 한다.




허수아비 놀이를 하면서

나는


속으로 되뇌인다.



'그래, 나는 의사가 아니야.

지금 이 순간만은, 나는 허수아비야.


그래, 나는 외과의사가 아니야.

잠시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마음 수련을 하고 있을 뿐이야. 


그래, 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지금 넓은 벌판에서 홀로 고독을 즐기는 허수아비일 뿐이야.'




핫하하핫. 나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지요. 핫하하핫. 너무나 즐거운걸요. 핫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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